반항하는 시지프스
지난주에 참석한 독서모임에서는 김상욱 교수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을 다뤘다.
해당 도서는 물리학자의 시각으로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해 보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다. 모든 이야기의 기점이 되는 원자부터 시작해서 물질로, 다시 물질에서 생명으로, 그리고 생명에서 인간으로 이어지는 전 층위를 조망하는 과학책이다.
비어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
발제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인간은 법, 국가, 종교와 같은 상상의 체계를 공유하며 협력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허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물리적으로 우리 몸을 포함한 모든 물질의 99.9%는 사실 텅 비어있는 공간인데 전자기적 반발력 때문에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인류는 인지 혁명을 통해 추상적 사고를 하게 되었고 비어있는 세계에 허구의 영역을 만들어 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건설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허구의 체계가 국가, 법 등이라면 점점 범위를 좁혀 들어가면 결국에는 육체까지도 허구의 시스템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육체는 정신이라는 본질이 물리세계와 상호작용하기 위해 사용되는 최적의 인터페이스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 밖의 모든 물리 세계 역시 전부 허상이 된다.
일원론(물리주의)은 우리 정신이 뇌의 물리적 반응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정신이 육체에 종속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오히려 육체야말로 정신을 담거나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장 정교한 허구의 체계가 아닌가.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정신으로만 이루어진 개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평소에도 종종 해왔다. 그런 마음은 개인이 뇌라는 기계의 부속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독립된 주체로서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존재이고 싶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유하는 정신(Cogito)
나의 의견은 데카르트의 이원론과 궤를 같이 한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했다. 내 눈앞의 사물, 몸의 감각, 심지어는 1+1=2라는 진리조차 악마가 속이는 허상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허구라고 의심하고 있는 나의 생각 만은 절대 가짜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원론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회의’인 것이다. 즉, 의심 가능한 것(육체)과 의심 불가능한 것(정신)은 본질적으로 같을 수 없다는 논리이다.
AT필드: 경계
여기에 정신이 육체라는 하드웨어에 담겨있다는 막연한 감각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한 작품이 있다.
에반게리온에는 AT필드(Absolute Terror Field)라는 방어체계의 일종인 개념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적의 공격을 막는 방어막이 아니며 이 필드의 본질은 나와 타인을 구분 짓는 마음의 벽이라고 할 수 있다. 작중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은 AT필드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 덕분에 육체가 흩어지지 않고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설정이다. 한마디로 정신은 AT필드라는 경계를 쳐서 붙들어지고 있다. 후반부에 이르면 ‘인류 보완 계획’이 실행됨에 따라 자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거대한 액체(LCL)환타로 환원된다—AT필드는 없는 거야.
육체는 정교하게 설계된 허상에 지나지 않으며 오직 정신만이 실체라면 허무한가? 바쁜 와중에 실체도 아닌 육체 따위를 위해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아까운가? 우리는 모두 언젠가 LCL로 환원되어 하드웨어를 반납하고 본연의 정신으로 돌아갈 날이 예정된 채로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타로 녹아내리기 전까지 이 허구의 체계 안에서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까뮈의 부조리(Absurdity)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과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원자 덩어리의 세상 사이에서 충돌하는 개념이 바로 까뮈의 부조리이다. 돌이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산꼭대기로 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는 허무에 빠져 죽음을 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까뮈는 반항을 택하라고 한다. 그 반항은 응 가짜인 거 나도 다 알아. 근데 어쩌라고. 그래도 돌을 굴려 올릴 건데? 하는 마음이다.
녹아내리기 전까지 이 한 몸 불태우겠다 (반항)
결코 게으른 허무주의에 빠져 하드웨어를 방치하고 싶지 않다. 진정한 실존은 세상이 허구임을 명확하게 인지하면서도 그 시스템 안에서 주어진 육체를 정교하게 운용하는 것에 있으니까. 환타가 되어 녹아버리기 전까지 돌을 밀어 올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운동을 하고 고단백 식단을 준비한다.
"혈연관계가 아닌 이들과 조화롭게 사는 방법은 수많은 허구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중략)... 허구를 따르지 않는 경우 즉각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허구의 리스트는 점점 길어졌고,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 허구였는지조차 잊어버릴 만큼 허구를 실재라 믿으며 살아간다." (김상욱,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