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대 위에서 중심 잡기
인내심이 강하다는 평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스스로 유독 강한 의지를 지녔다거나 대단한 고통을 참아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다. 다만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기면 그걸 이루기 위해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그걸 실천하는 습관은 잘 들어있다.
예를 들어 “건강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하자—건강은 나의 삶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이다. 각자의 몸 상태에 따라 필요한 것은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다음과 같은 실천 회로가 정해진다: [근육량을 늘려야 한다→ 근력 운동량을 늘리고 단백질을 섭취해야 한다→ 근력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 장소 등 세부 계획 수립, 단백질은 언제 무엇을 어떻게 챙겨 먹을지 시스템화→ 정한 대로 착수].
말단의 행위—매일 아침에 단백이(난백제품)를 먹고 점심에 회사 헬스장을 가는—만 놓고 보면 지키기 어려운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 지키기 힘든 날도 있다. 그러나 최초의 목표—건강하고 싶다는—를 생각하면 결국 이건 누가 칼 들고 협박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분명하다. (중요)
핵심은 목표와 행위 사이에 연결고리를 잃지 않는 능력이다. 필요에 따라 심지어는 하기 싫은 일도 진정성 있는 이유를 부여하여 정성스럽게 하고 싶은 일로 개조하기도 한다. 사실은 하기 싫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부 하고 싶은 일로 만들어서 루틴화하는 것에 능숙한 것이다.
가끔 모든 루틴을 벗어던지고 싶은 날에는 일탈을 당당하게 만끽한다. 어쩌면 나는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 99%의 루틴을 지키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일탈을 부끄럼 없이 마주하기 위해서는 디폴트 값 세팅이 중요하다. 무질서가 기본값인 삶에서의 일탈은 그저 방종의 연장일 뿐이지만, 할 일을 다 하고 맞닥뜨린 일탈은 계(system)의 엔트로피 수준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그냥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동물처럼 편하게 살면 안 돼? 당연히 그럴 수 있고 그런 삶도 존중한다. 그런데 그건 나의 천성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엄격한 이유는 최선을 다했는지 확실하게 알고 싶기 때문이고, 그것은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임계값의 최적화 (가장 중요)
또한, 이 일탈이 정당한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다. 스스로를 속이지도, 학대하지도 않는 최적의 지점을 찾아가야 한다. 결국에는 최적화다. 이것이 나에게 허용된 엇나감인지, 혹시 타협이나 핑계는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threshold)을 찾으며 나라는 예측모델을 학습시키는 과정이 내가 추구하는 성숙의 방향성이다. 그래서 누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거든 늘 나 자신을 온전히 다 아는 것이라고 답하곤 한다.
하루키의 균형점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나 자신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중략)… 얼마만큼, 어디까지 나 자신을 엄격하게 몰아붙이면 좋을 것인가? 얼마만큼의 휴양이 정당하고 어디서부터가 지나친 휴식이 되는가? 어디까지가 타당한 일관성이고 어디서부터가 편협함이 되는가? 얼마만큼 외부의 풍경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얼마만큼 내부에 깊이에 집중하면 좋은가? 얼마만큼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고, 얼마만큼 자신을 의심하면 좋은가? 만약 내가 소설가가 되었을 때 작정하고 장거리를 달리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내가 쓰고 있는 작품은 전에 내가 쓴 작품과는 적지 않게 다른 작품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루틴을 즐기는 이유도, 일탈을 즐기는 이유도 결국 나의 인생을 더 만족스럽게 경영하고 싶다는 하나의 목적 아래 있다. 혹자는 너무 자신에게 엄격한 것은 아닌지 물을 수도 있겠다. 정말 그랬던 적도 있다. 나를 모르던 시절에 규칙을 정하면 그것에 예외를 두지 않고 지켰다. 한번 예외를 두기 시작하면 규칙을 어기는 것이 쉬워지고 당연해져서 결국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할까 봐 그랬다. 그러다가 몸이 아플 때도 있었다. 구부러질 줄 몰라서 부러졌던 시간이었다. 여러 번의 에포크(epoch)를 돌고 시행착오 끝에 이제는 나를 더 잘 알게 되었다. 하루키가 길 위를 달리며 소설 쓰기를 배운 것처럼 나도 균형을 잡는 지혜를 배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