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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Jan 12. 2021

각자의 시야

#1. 사람, 세상.

 

  가끔 죽고 싶을 때가 있다.

  이상한 일이다. 생물의 본질적 의의가 번식에 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자기 파괴의 욕구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생명이 그다지도 존엄한 것이라면, 어째서 사람들은 점점 더 결혼에 무심하고 출산을 거부할까.


  사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는 세상이라고 한다.

  사는 게 쉬운 세상이 어디 있다고.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가 과거에 비해, 훨씬 복잡하면서도 헤아릴 수 없는 규모로 확장되고 있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세상은 너무 복잡해졌다. 너무 많은 사람이, 너나 할 것 없이 한 두 마디씩 거드는 세상이다. 우리는 어쩌면 상당히 시끄러운 시대에 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에서, 나는 어디쯤 있는 걸까.




  무언가를 멀리서 볼수록 그것과 주변 환경의 시각적 차이는 줄어들고, 더 단순해진다. 나무를 먼발치서 보면 그저 숲의 일부고, 인간을 멀리서 보면 그저 조직의 일부, 사회의 일부, 지구 구성원의 일부다. 학문의 본질은 그렇게 먼 시야를 가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70억이 넘는 인구 개개인 전부를 조사하거나 연구할 수 없다. 하물며 세상에 존재하는 오만가지 사건과 현상을 전부 기록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는 학문들은 항상 넓은 시야를 가지고, 개개인 간의 차이를 줄일 수 있을만한 뭔가를 가정한다. 경제학은 합리적인 주체를, 심리학은 인간 정신의 보편성을, 역사는 특정한 사실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보편적인 원리나 법칙 같은 것들을 발굴해내려고 노력한다. 이것만 알면 인간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고, 사회 현상이나 세상의 원리를 더 잘 알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람이 그들의 주장에 납득할수록 학문은 힘을 얻는다. 나아가 학문의 발견은, 그 자체가 사회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예컨대 인터넷 상에서 간편하게 할 수 있는 약식 MBTI 검사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우리는 주위에서, 혹은 적어도 온라인에서 자신이 '무슨무슨 유형'이라고 주장하며, 그 같은 범주의 성격적 특징을 내세우는 경우를 목격할 수 있다. 사실 이상한 일이다. 특정한 질문에 대한 응답의 경향성이 특정한 유형으로 나온 것인데, 그 유형을 내세우며 자신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는 우리를 설명하는 체계나 범주에서, 우리 자신의 욕구를 발견한다. 그렇게 되고 싶다는 욕구, 편리하게 자신을 설명하고 싶다는 욕구, 다른 사람 또한 몇 가지 범주에 대한 이해만으로 파악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구 등등. 어느 순간부터 MBTI 검사의 결과는 그의 경향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평가가 목표가 되는 것이다.


  학문적 산물이라는 게 그렇다. 사람의 감정은 어떻고, 정신 작용이 어떻고, 사회는 어떻고 경제 원리가 어떻고 하는 것은 기존에 존재했던 이론과 학자의 탐구가 결합되어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는 바람직한 발전이다. 학문이 시대와 사회에 적응하고, 그들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지식을 제공할 의향이 있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들이 탐구하는 대상이 그러한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유도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하다는 사실이, 그래야 한다는 당위로 작용하기도 한다. MBTI 검사의 결과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말이다.


  우리는 한낱 개인일 뿐이다. 아마존 열대우림 안에 들어 있는 한 그루의 나무일뿐이고, 드넓은 모래사장의 모래알 한 톨일 뿐이다. 사회에 속해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우리는 집중된 시야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종종 넓은 시야에서 자행되는 교묘한 유인을 놓칠 때가 있다. 우연이 필연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사실 상품을 선전하는데 연예인이 나와 상품 정보와는 전혀 상관없이 노래하고 춤추거나 아양을 떠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하물며 기능적인 작용을 할 뿐인 물건 따위의 것들이 사랑이나 설렘, 안정이나 기대 같은 감정을 대표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우리는 어쩌면 편해지고자 너무 많은 것들에서 눈을 돌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눈을 돌리고, 먼발치에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제시하는 이들에게 너무 많은 것들을 내맡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철부지다. 전문 지식이 어쩌고, 학술적 용어의 정의가 저쩌고 하며 떠들고 싶은 생각 없다.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처럼, 당연한 것도 내 마음대로 한 번 더 생각해보고, 모호한 것들도 내 방식대로 해석해보려고 한다. 그것이 인문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학문적 사조 내에서의 논의를 포함하고 있는지 해설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내가 보는 세상과 사람, 관계나 감정, 돈, 명예, 자존심, 사랑, 도덕, 사회적 이슈 같은 것들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보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옳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시야가 당신보다 더 넓고, 정확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을 것이다. 인문학이 인간과 사회, 세계에 대한 의미를 규명하는데 목적을 둔 학문이라면, 이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또렷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에 뜻이 있는 분야라면, 내가 당신에게 제공하는 나의 주관 역시 인문학적인 성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적어도 무언가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순 있을 테니까.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나와 다른 관점을 견지하는 의견도 들어보고 싶다. 내가 보는 것을 다른 사람도 보는지, 내가 사는 세상에 다른 사람도 살고 있는지 나는 늘 궁금해왔으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나의 말이 당신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고, 또 당신의 말이 나의 가치관에 반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세상에서 말이다. 나는 그 같은 과정을 '가치 있는 여정'이라고 부르고 싶다. 당신이 포기하지 않는 한, 나 역시 그 여정에서의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죽고 싶어 지는 이유가 뭘까.

  아마 살아야 하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거나, 명확한데도 크게 와 닿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왜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그렇게도 찾고 싶어 할까. 삶의 의미는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인데.

  '주어지는 의미'는 길을 잃기 쉽다. '만들어가는 의미'는 스스로 관철해나갈 수 있다.

  나는 가끔은 망설이고 헤매더라도, 스스로 관철할 수 있는 삶을 지향한다.


  자신의 위치를 특정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주위에 있는 것들을 두드려 보고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나의 글이 당신의 삶의 궤적을 헤아리는 가늠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아가 어디를 가고 싶은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확신을 가지는 재료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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