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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Jan 13. 2021

삶을 변화시키는 소통

#2. 소통, 차이.

 

  TV를 틀면 멋있고 예쁜 사람이 많이 나온다.

  요즘엔 화장 기술이나 패션에 대한 감각이 보편화되어서 조금만 꾸며도 누구나 훈남훈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외모를 꾸미는 일은 누구에게나 번잡하고 귀찮은 일이지만, 타인을 마주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외모인지라 다들 알게 모르게 신경 쓰기 마련이다.


  모두가 알게 모르게 신경 쓰니, 모두가 그것을 비교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누가 더 예쁘다던가, 누가 더 멋있다던가 하는 소리가 빈번하게 오간다. 웃음기 섞인 농담조로 교환되는 경우도 있고 온라인 상에서 진지한 논쟁을 일으킬 때도 있다. 그런데 '누구의 외모가 더 낫다'라는 말은, 둘을 비교했을 때 한쪽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쪽이 더 뛰어나다는 건, 그것을 판별할 기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준이 통용된다는 건, 줄 세우기가 가능하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맨 앞줄에 서게 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외모를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끝없이 비교하는 게 가능하다면, 언젠가 그 답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대상을 비교하고 평가한다. 아이폰 시리즈가 갤럭시 시리즈보다 낫다거나, 삼성 전자 주식을 사는 것이 비트 코인에 투자하는 것보다 현명한 선택이라거나, 소나타 살 바에야 돈 더 보태서 그랜저를 사는 게 합리적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같은 평가의 결론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때, 잦은 갈등이 발생한다.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언성은 높아지고, 서로 상대방이 자기 말은 듣지 않으면서 고집만 피우고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둘은 마냥 답답하다. 누가 봐도 내가 생각하는 결론이 더 나은데, 왜 이 사람은 들어먹질 않는 걸까? 왜 알량한 자존심 하나 챙기자고 핏대를 세우며 억지를 부리는 걸까?


  이윽고 두 사람은 똑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말이 안 통하니, 그냥 말을 말자.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의 반복으로 이미 많은 분야에 대해 이 같은 결론을 내린 지 오래다. 이제 정치적 견해, 종교, 취향과 선호 등의 문제를 논쟁의 대상으로 앞세워선 안 된다. 나의 의견은 나의 주관이고, 너의 의견은 너의 주관일 뿐이다. 그러니 서로의 주관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느라 힘 빼지 말고, 그냥 각자 그대로 살게 내버려 두자. 사람들은 이것을 존중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비교 우위를 결정할 때, 특정한 기준을 적용하게 된다. 예컨대 자동차를 선택하는 기준이 외양이라면 A가 낫고, 기능성이라면 B가 낫다고 말할 수 있듯이, 저마다 무언가를 선택할 때 말하는 기준이 제각각일 수 있다. 소통에 있어서는 이렇게 어떤 결론에 대한 숨겨진 전제를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타인과의 대화는 그저 '공개적인 혼잣말의 향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타인의 숨겨진 전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는 경우, 상대방의 말은 내가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인 전제와 인상에 의해서만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내가 하는 말을 내가 듣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 대화는 끝나고 보면 머릿속에 남는 게 없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 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희미하다. 그러한 대화는 그저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되풀이하고 재생산하는 소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동차의 디자인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x가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고 그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B 자동차가 더 낫다는 y의 의견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x의 입장에선, y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물며 둘이 대화하는데 y 역시 그러한 태도를 고집한다면, 이런 소통은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을 벽에다 대고 소리 높여 떠드는 것으로 끝날뿐이다. 이 경우, x와 y는 아무것도 교환하지 못한다. 어떤 변화도 야기할 수 없다. 그저 원래 서있던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각자의 진영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나 사람을 직면하게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믿음, 상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가 일어나거나,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런 상황에서 직관적으로 결론을 내려버린다. 아, 저건 잘못된 거구나. 이상하거나 어리석은 것이구나. 혹은 심지어 나쁜 것이라는 판단마저 도출된다. 이러한 직관은 순식간에 작동한다. 특히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그러한 판단에는 노력이 필요치 않다. 대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는 참 이상한 일이다.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들 중 누구 하나, 나와 다른 시간 단위를 사는 사람은 없다. 내가 수많은 1초, 1분, 1시간을 쌓아 인생을 살아왔듯,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과 관련된 무언가를 판단할 때, 그렇게 빨리 결론을 내려버리고 마는 걸까? 사실 답은 명백하다. 귀찮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대해 더 알려고 노력하고, 더 적합한 이해를 갖추기 위해 소통하는 일은 너무나도 귀찮다. 너무 귀찮은 나머지, 자신의 세계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먼발치에서 대충 한 두 마디 거드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정도다. 진정한 의미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보다, 대화를 가장한 혼잣말을 떠드는 것이 속 편한 일이다. 그것을 '어른스러운 대화'라고 지칭하면 더할 나위 없다.


  이에서 비롯된 태도의 차이는 실제 사회관계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물론 그러한 태도가 '예의 바르다'거나, '잘 들어준다'는 식으로 포장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저 귀찮은 나머지 대충 맞장구 쳐주고, 속으론 그렇지 않지만 겉으로는 동의하는 척 고개만 몇 번 끄덕일 뿐인데 좋은 사람이 되어 있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심지어 그런 걸 두고 현명한 처세술이란다. 하지만 사실, 알 사람은 다 안다. 그러한 태도와 평가가 만연한 조직은 단지 그 조직에 속해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귀찮아하는 사람'인 것이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작동되는 논리를 열띠게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둥 마는 둥 적당히 의례적인 반응으로 넘기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소통에 참여할 생각 없이,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 싶을 따름이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이들에게 소통을 통한, 진정한 의미의 변화나 발전은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의 세계에서 소통이 수행하는 역할은 그저 재생산과 반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너의 의견은 너의 의견이고, 나의 의견은 나의 의견이니 서로 터치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이것은 존중이 아니다. 방종에 불과하다. 당신의 결론에 어떤 전제가 도사리고 있는지, 나의 주장에는 어떤 이유가 포함되어 있는지 서로 이해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 없이, 그저 '공개적인 혼잣말의 향연'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변화는 차이를 차이로 인식하고, 그 차이가 내포하고 있는 이유와 논리를 인식할 때 비로소 발생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이란 각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나 사건, 생각 따위의 것들을 상대방에게 오해받고, 왜곡되고, 심지어는 부정당할 위험마저 감수하면서도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러한 소통의 시도를 지속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발전과 자아의 성숙, 세계에 대한 인식의 확장을 이뤄내기 위해서다. 성숙한 소통의 과정을 감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까지고 정신적 어린아이로 남아있기 마련이다. 차이에 분노하고, 욕망에 떼를 쓰는, 그저 정답과 오답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에서 사는 어린아이로 말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적어도, 그것이 필요하지 않을 때보단 더 노력해야 한다. 이 황금률은 소통 과정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의미 있는 소통을 수행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조금 더 신경 쓰고, 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 상대방의 결론에 도사리고 있는 생략된 전제를 이해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당신이 진지하게 그러겠다고 결심한다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단지 관계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말이다. 왜냐하면 결국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건 세계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의 본능을 진심이라던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지 말자.

  누구의 외모가 더 낫다거나, 누가 더 똑똑하다던가, 실력이 더 낫고 능력이 더 좋다는 말은 대부분 허상이거나 편향된 기준에 불과하다. 무언가를 보고 0.1초 만에 좋은 느낌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에 집착할 필요 없다. 차이에 우열을 부과하는 건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마찬가지로 당신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물론 모든 것이 '변화시켜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변화가 항상 좋은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변할 수 있다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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