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얼 하든 간에, 경쟁심을 가지는 것은 가능하다. 당장 곁에 라이벌이 없더라도 머릿속에서 누군가를 목표 지점으로 삼는다면,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면 그게 경쟁이다. 경쟁은 힘들다. 누군가를 앞서고 이기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경쟁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은 정신에 나약함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명확하게 드러나는 결과를 비교할 수 있을 때, 그 결과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경쟁 구조에서 벗어나 있는 노력을 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의 처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다.
이를테면 더 높은 토익 점수를 얻기 위해서 공부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해 보이지만, 더 깊은 지적 소양을 갖추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은 어쩐지 모호하게 느껴진다. 책을 읽는다고 정말 기대하던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애당초 지적 소양의 수준은 무엇을 두고 판별할 수 있는 걸까? 이런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우리는 스스로 다시 가시적인 경쟁의 굴레 속으로 뛰어들고자 한다. 어쨌든 그러한 경쟁에서의 결과는 눈에 보이고, 그렇기에 그를 위한 노력이 더 의미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그게 더 실용적이라고 믿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경쟁은 노력의 가치에 대한 실감을 제공한다.
어떤 영역에서든 경쟁에 임하기 전에 소위 '밑밥'을 까는 경우가 있다. 밑밥의 구체적인 내용이야 천차만별이지만 핵심은 같다. 내가 지금 이런 사정이 있어서, 어떤 불가피한 문제를 겪고 있어서 본 실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설령 지더라도 어엿한 패배라고 볼 수 없다. 심지어 이런 나에게 진다면 너는 대단히 낮은 수준의 무언가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며, 이긴 나는 너보다 월등한 존재인 것이다. 이것은 혹여나 닥칠 패배의 결과에서 자신의 자존감을 보호하기 위한 보험이자, 승리의 결과에서 우월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이다. 물론 정말로 불가피한 애로사항을 단지 설명하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대부분의 경우 상기한 내용을 내포한 '장치'로써 제시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이상하리만치, 더욱이 젊은 세대일수록, 재능이나 천재성에 열광하는 듯하다. 특히 별다른 노력의 투자가 없었던, 심지어 처음 접하는 분야에서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해온 사람을 꺾게 되면 그가 느끼는 우월감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경쟁이 발생하는 분야에서 양자가 어떤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왔고, 실제 경쟁 구도에서의 양상이 어땠으며, 결과 너머에 어떤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지 생각해보려는 일 없이, 이분법적으로 갈리는 승패 그 자체에 매몰되어 사람들의 반응이 갈린다. 환호와 찬미, 조롱과 멸시가 승자와 패자에게 쏟아진다. 한쪽을 대단한 재능이라고 치켜세우는 동시에, 다른 한쪽을 소위 '노력충'이라며 비웃는다. 노력 자체를 마치 열등한 것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는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손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시험날만 되면 주변에 자기 스스로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은 학생'이라는 점을 유난히 강조하던 이들이 즐비했다. 심지어는 눈을 부라리며, 나는 정말로 교과서 한 번 읽지 않았고, 전날에 밤새 게임하거나 혹은 평소보다 일찍 잤으며, 그렇기에 분명 시험 결과도 망할 것이라는 말을 진지하게 늘어놓는 이들도 있었다. 반면 본인은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고, 이번 시험도 반드시 잘 볼 것이라고 결의를 다지던 학생은 거의 없었다. 항상 성적이 높게 나오는 학생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학생들의 행태를 밑밥의 장치로써의 속성을 생각해보면,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실패'에는 다소 관대하지만, '노력한 실패'에는 치를 떤다. 그래서 이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노력하지 않음으로써 모종의 가능성을 남겨두는데 만족한다. 내가 진지하게 임하지 않아서 그렇지, 노력만 했다면. 내가 흥청망청 인생을 즐기느라 그런 거지, 하려고만 했다면. 그랬다면 분명 잘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 가능성을 확인하지 않는다. 확인한 결과가 자신의 기대와 다른 경우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핑계를 전제하지 않는 노력의 과정이 없다면, 그는 언제까지고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결과보다 가치 있는 과정이 있을까? 특정한 결과나 성과에 대한 신봉이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선 아무리 좋은 이론과 분석이 뒷받침되어 있어도, 실제 결과가 그것이 예측한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헛소리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목표를 향해 백날 노력해도 그것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노력 자체가 인생을 허비한 것으로 본다. 이 같은 사회에선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제시할 수 있을 때만 당신은 존중받을 수 있다. 더 많은 경쟁에서 더 좋은 지표를 보유하고 있어야만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결과는 증명과 동일시된다. 그럼 과정은 무엇일까? 결말로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는 활자 낭비에 불과할까?
나는 노력의 가치에 대한 뻔한 예찬을 늘어놓으려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결과와 과정이라고 구분하는 경계와, 그들 각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의 의미가 점점 왜곡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8년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가 결국엔 실패하여 다른 직장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을 상상해보라. 아마 많은 사람이 그를 비웃거나 손가락질할 것이다. 혹은 안쓰럽게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적어도 하나의 경쟁에서 패배해 나가떨어졌으니까.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것이니까. 게다가 공무원 준비는 임관에 실패하면 정말로 남는 게 없다는 인식이 팽배한 실정이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예시 속 사람은 8년 간의 준비 과정 끝에 공무원 임관 실패라는 결과를 맞이했다. 그는 8년 간 한국사, 영어를 비롯한 다양한 과목을 공부했다. 하지만 이게 그 사람의 8년을 설명하는 적합한 요약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과정이나 기간을 설명할 때, 오롯이 그 자체에 국한되는 독립적인 시간대를 상정하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부수적인 것을 덜어내고, 잔가지를 처내 요약하는 것이 효과적인 이해 방식이라고 여기곤 한다. 하지만 과정과 결과의 구조는 인위적으로 부여된 논리 구조 속에서만 작동되는 대비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계속해서 삶을 지속하는 한, 그 속에서 일어난 일이나 특정한 기간에서의 '과정'이, 나중에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어떤 '결과'가 어떤 구조 속에서의 과정에 속해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예컨대 그는 공무원 시험 준비 기간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수기를 작성하거나 웹툰을 그려 사회적 성취를 이뤄낼 수 있다. 혹은 무언가를 오랜 기간 준비해본 경험으로, 비교적 더 쉬운 기준치를 요구하는 다른 분야로 수월하게 진입할 수도 있다. 준비 기간 동안 알게 된 다른 사람들과 뜻을 같이해 사업을 할 수도 있고, 보다 낮은 수준의 학력을 대상으로 과외를 제공할 수도 있다. 물론 실패에 너무 낙담한 나머지 자살할 수도 있다. 나는 단순히 낙관론을 떠들고 싶은 게 아니다. 핵심은 많은 사람이 과정과 결과의 대비를 특정한 구조 속에서만 생각한 나머지, 노력의 가치를 열등한 것으로, 재능의 가치를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경쟁이라는 특정한 구조처럼 말이다. 그러한 편향에서 벗어날 때야 비로소 우리는 실패에 좀 더 관대해질 수 있으며, 입체적인 삶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승패의 결과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장치는 상대방을 칭찬하는 것이다.
배드민턴 경기를 떠올려 보라. 내가 만약 배드민턴 경기에서 지고 나서 상대방을 칭찬한다면, 그것은 내가 못했다기보단 상대방의 실력이 뛰어나서 졌다는 식의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기고 나서 상대방을 칭찬한다면, 상대방의 실력이 준수한 만큼 그를 이긴 나는 더 뛰어나다는 함의를 표현할 수 있다.
이 장치의 가장 효과적인 측면은, 누구도 기분 나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되도 않는 밑밥을 깔거나 상대방을 깎아내릴 생각부터 하기보단, 최선을 다해 노력하되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상대방을 칭찬하는 습관을 들여보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