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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Jan 15. 2021

'나'를 이해하는 여정

#4. 가치, 지향.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이 최고라고들 한다.

  행복도,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돈이 부족한 건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보라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돈은 확실히 범용성이 넓은 가치이다. 사랑을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처럼 구매할 수는 없지만, 경제적 안정이 인간적 호감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돈은 어찌 됐건 이 사회에 속한 채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겐 필요한 것이다.


  물론 당연히,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작용할 순 없다.

  그것은 돈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예컨대 돈이 정말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우리는 사기꾼을 비난해선 안 된다. 기타 범법을 통해 이득을 취하는 이들을 욕할 수도 없다. 그것이 공정함이든, 적법성이든 뭐든 어쨌든 모든 사람은 돈의 가치를 전제하는 그 이상의 뭔가를 상정하고 있다. 다만 내가 이러한 당연한 사실을 못 박는 이유가 돈의 가치를 폄훼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후술 할 가치에 대한 논의에서 '그래도 돈이 최고 아닌가?' 하는 독단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꼭 거창한 인생 목표 같은 건 없더라도, 소박하게 지속되는 일상 속에서 지향하는 무언가가 누구에게나 존재하리라.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는 일반적인 상식에 동의할 수 있다면, 그러한 지향을 갖추는 데에도 분명 원인이 있을 것이다. 사람의 정신이라는 건 생각보다 유연하고 민감해서, 다른 사람이 보기엔 대단히 작고 사소한 일인 것 같은데도, 누군가에겐 그런 일이 가치관의 주요한 요소로 작용할 때가 있다. 다소 뻔하게 느껴질 수 있는 책의 글귀 한 줄에서도, 농담 삼아 오가는 영화 속 대사 한 두 마디에서도 우리는 종종 감동을 느끼며, 심지어는 그 같은 경험으로 말미암아 삶의 방향성마저 일부 조정하게 된다.


  화살이 활시위에서 떠날 때, 그것의 방향이 아주 조금만 틀어져도 화살은 완전히 엉뚱한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 하물며 아주 오랜 시간 날아가는 화살을 상상해보면, 그들 간의 차이는 더더욱 벌어질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왠지 하루하루 똑같고, 쳇바퀴 굴러가는 듯한 인생처럼 느껴져도, 일상에서 느끼는 사소한 감정이나 생각, 잊어버리고만 느낌 같은 것들이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에 영향을 끼친다. 인간의 삶은 크든 작든 끊임없이 변화를 겪는 일종의 유기체다. 단지 그 정도가 한없이 작을 때, 내일이나 모레의 '나'는 그전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끼는 것일 뿐, 그 한없이 작은 무언가가 1년, 2년 쌓이면 자신도 모르게 전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변화는 필연적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은 아닐뿐더러, 많은 것들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달라지기도 한다. 특히 자신의 삶에서 보다 가치 있는 지향을 형성하지 못했거나, 일상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수동적으로 인생을 구성하는 이들에게 이 같은 예측불가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이것이 항상 나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운이 좋다면, 수동적인 삶을 영위해가는 이들 역시 가치 있는 삶과 평안한 일상을 누릴 수 있다. 어쨌든 인생이라는 게 단순히 노력한 만큼 보답받고,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니까.


  사람이 목표를 세우고, 어떠한 지향을 설정하는 이유는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삶의 사소한 부분들마저 자기가 바라는 무언가를 향해 귀결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에서다. 오전에 커피를 마시며 의자에 늘어져 있다가도, 어제 세운 계획표를 떠올리면 시답잖은 생각으로 가득 찰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방향성을 갖추게 된다. 그러한 방향성이 꼭 생산적인 결론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몇 가지 사고의 가능성을 삶에 생산적일 수 있는 요소로 좁혀준다. 그런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도 아닌, 그 중간 지점의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삶에서의 지향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에서 비롯된다. 절대다수의 사람이 행복한 삶을 바라지만, 그 삶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은 제각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행복 그 자체를 추구한다기보단, '어떠한 삶의 형태에서 얻어지는 행복'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행복의 정의가 저마다 다를 테니까. 누군가에겐 즐거운 일이, 다른 누군가에겐 아닐 수 있으니까. 그러니 사람의 가치관을 가늠할 땐 좀 더 특징적인 무언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돈이나 사랑, 명예, 정직과 신뢰, 사회적 영향력이나 소유욕 같은 것들이 있으리라.




  여기서의 핵심은 타인이 지향하는 가치의 방향성을 그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인생에서 건강한 지향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라는 말도 아니고, 고집스레 한 방향으로 밀어붙이라는 소리도 아니다. '건강한 지향'이란, 자기가 중요하다고 믿는 가치에 대해 그것의 중요성을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럼으로써 행동으로 이어지는 실천을 지속할 수 있는 자기 이해의 방식이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선 있는 그대로의 내면을 돌이켜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아가 뻗어가는 방향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즉, 가치의 지향을 형성하는 일은 자기 인식의 핵심적인 열쇠이다.


  동시에 우리는 상황 조건에 따라 지향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와 겸손함이 필요하다. 내가 나의 삶에 있어 어떤 가치를 중요하다 여기고, 그 가치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일상을 조정해나가는 과정에서, 그것에 대한 인상이 달라질 수 있다. 보다 나은 가치를 발견하거나, 혹은 기존의 가치에 대한 재고가 필요할 때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생의 모든 부분을 계산하고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겸손함이 중요한 미덕 중 하나여겨진 것이다. 그것은 근거 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는 결단력을 의미하며, 삶을 유동적으로 형성나갈 수 있는 힘의 전제 조건이다.

 



  돈이나 자동차, 기타 물질적 대상을 삶의 지향으로 삼는 이들이 있다.

  순전히 내 주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러한 시도는 항아리에 물건을 넣는 것과 같다. 항아리에 각진 고체 덩어리들을 집어넣다 보면 빈 공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빈 공간이 바로 현대인이 마주하고 있는 우울과 공허의 본질이다. 경제적 성취는 그 너머의 기치 아래에서만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 세속적인 것은 삶의 본질이 될 수 없다.


  항아리와 같은 정신에는 물과 같은 추상성이 필요하다.

  우리가 책을 읽거나 사유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추상적 부산물 같은 것들 말이다. 정신은 그러한 훈련을 통해 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해진다. 그리고 그 같은 조건들이 갖춰져 있을 때, 자아는 물질적 대상을 안전하게 감싸 안을 수 있다.  두 가지가 적절히 결합된 항아리 속이야말로 건강한 정신 상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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