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각 Jan 19. 2021

일상을 변화시키는 힘

#5. 분노, 에너지.

 

  가끔 속에 화가 많이 차있는 듯한 사람을 보게 된다.

  음양오행이나 사주명리에 따른 구분을 말하는 게 아니다. 겉으로는 싹싹하고 더없이 온화한데도, 어쩐지 속에서 해소되지 않은 분노가 들끓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의 이러한 느낌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대부분 맞다고도 말 못 하겠다. 하지만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 어떤 사람들은 내면의 파괴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굴지 않기 위해 일상 속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후술할 '에너지'는 무언가를 산출해내는데 필요한 힘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신비주의적인 관점에서의 무언가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동양 철학적인 무형의 기운 따위를 논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이 같은 관점들이 다른 과학주의에 따른 이론에 비해 열등하다는 걸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에너지'라는 용어의 쓰임과 맥락의 결이 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자 함이다.




  누구나 유독 화가 나는 역린 같은 게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이를테면 나는 과거에,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하라는 소리를 들으면 반사적으로 화가 났다. 울컥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그만큼 이유를 설명할 수 없으면서 강한 주장을 하는 이들을 보면 짜증이 치솟았다. 설령 나중에 그 견해가 참인 것으로 드러나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본인의 주관적인 믿음을 뭐 그리 진리처럼 떠들어댈까, 하는 생각에 속으로 그의 인격성마저 폄훼했다. 물론 다소 극단적인 반응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지금은 그런 사람을 봐도 분노가 이르기보단 어떤 이유에서 그러한 태도를 가지게 되었는지 살펴보려고 노력한다. 처음엔 그러한 노력이 일종의 전환으로 작용했다. 분노가 내포하고 있는 파괴적인 성질을 능동적인 에너지로 삼아 다른 방식의 인지 작용을 유도한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러한 '전환'조차 결과적으론 나에게 해가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애당초 분노의 근간을 조절하려고 애쓰고 있다.


  종종 자기계발서 같은 책을 보다 보면 그런 말이 나온다. 감정이라는 것은 우리 몸 안의 에너지가 표출되는 방식일 뿐이며, 각각의 것은 다른 것으로 얼마든지 변환될 수 있다고. 말하자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란 내면의 에너지가 표출되고자 하는 다양한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힘든 사람, 즉 에너지를 남김없이 발산한 사람은 특정한 감정을 느끼기보다 멍해지고, 오히려 별다른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지 않게 된다고 한다. 여기서 강조하는 핵심은 우리가 느끼는 소위 부정적 감정들, 분노, 슬픔, 혐오, 고립감 같은 것들을 다른 감정적 형태나 특정한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화가 나면 운동을 해보라는 말이 그러한 맥락에서의 주장이리라. 자신이 처해있는 '현재'의 모든 것을 비관하는 우울이나 고독 같은 것들 역시 현 상태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에너지의 표출이니, 어떤 식으로든 '현재의 변화'를 도모하는 에너지로 쓰일 수 있다. 물론 심각한 수준의 호르몬 불균형, 혹은 장애를 통한 신체 병리 증상은 예외이다. 그것은 단순히 정신적인 노력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니까.


  나는 언제부턴가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고 실천해보려고 노력했다. 잦은 화를 불러일으키는 나의 세계에서 그러한 종류의 감정을 특정한 변화로 연결해보려고 했다. 사람들의 비합리성에 진저리가 날 때, 세상사의 군상이 지겹게 느껴질 때,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접해 무력감을 느낄 때, 나는 주로 책을 읽었다. 책을 읽음으로써 지적인 결과물을 생산해내려고 노력했고, 그러한 과정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지적인 훈련을 한다는 건 운동과 같은 신체 훈련과는 달라서, 당장 그 결과가 명료하게 드러나진 않는다. 예컨대 운동을 전혀 하지 않던 사람이 팔굽혀펴기를 2주 동안 꾸준히 한다면 당장 근육의 변화나 신체적 힘의 차이를 체감할 수 있다. 하지만 속된 말로 일자무식인 사람이 한 달 동안 두꺼운 책 두어 권을 읽는다고 그러한 종류의 가시적인 변화가 당장 드러나는 건 아닐 수 있다. 신체적 에너지의 발산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정신적 에너지의 소산은 먼저 내적으로 집약된다. 사고의 결을 조정하고, 나와 세상에 대한 인식을 조금씩 더 풍성하게 만든다. 그것을 외부 세계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발산하는 것은 다음 스텝이다. 어쨌든 지적 훈련은 그것의 내용을 내적으로 소화하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물론 내가 책만 읽은 것은 아니다. 그 외에도 일상 속에서 가능한 다양한 일들을 했다. 핵심은 그것들이 분명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전엔 그저 감정적 상태에 매몰되어 있었던 나는 특정한 변화의 양상을 맞이했다. 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 보였고,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떠올렸다. 나는 이제 무언가를 알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이해한다는 게 문자 그대로 '세상이 바뀐다는 것'임을 안다. 우리가 종이에 손을 베이는 이유는 종이가 만들어질 때, 돌가루가 섞여 그 입자가 고르지 못해, 얇은 피부 면이 그것에 닿을 때 살갗이 찢어지기 때문이다. 태양에서 나오는 자외선은 세포의 노화를 촉진시키고, 미세먼지는 우리의 몸속에 침투해 뇌기능이나 기타 장기의 활동에 장애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이다. 나는 인간이 타인에게 가지는 인식이 오롯이 그의 믿음 체계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성을 담지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나아가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평가하는 것들은 대부분 그 사람의 내적 활동에 대한 어떤 본질도 캐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 이러한 앎에는 시답잖은 것도 있고, 다소 중요한 것도 있다. 적어도 나는 이 같은 사실들을 '알기 전'과는 다르게 행동한다. 자외선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미세먼지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한다. 타인을 대할 때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정의'를 조정하고, 지구적 현상에 대해 보다 넓은 시야로 접근할 수 있다.


  감정의 전환은 이렇게 내가 실제로 경험했듯, '결과적으로' 효과가 있다. 물론 학술적인 수준의 엄밀함을 논하는 건 아니다. 나의 소박한, 주관적 경험을 토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내가 감정의 전환을 야기하기 위해 노력할 때, 나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나 환경 조건, 기타 변수들을 충분히 고려하여 관찰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나는 덜 분노하거나 분노에 대처하는 태도를 변화시켰다. 사람의 감정은 분명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언가를 움직이고, 또 변화시킬 수 있는 전제 조건으로 작용한다. 사람들은 종종 스포츠 선수의 운동 능력을 피지컬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경기에 참여하는 이들에겐 신체적 조건만큼이나 정신적인 고양, 지향 등도 중요하다. 그것을 적합한 방향으로 고취시키도록 많은 감독, 코치들이 엄청난 연봉을 받는 것이고, 실제로 명감독, 명코치라고 불리는 이들의 핵심적 능력이 그러한 작용을 유도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개인의 측면에서 볼 때, 부정적 감정의 변환을 통한 에너지의 산출은 부작용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더 빨리 소진되고, 사람을 더 지치게 하며, 감정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감정은 수동적인 반응이다. 수동적인 반응을 통해 산출한 에너지는 일시적이다. 그 말은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에너지를 통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때, 오히려 특정한 감정을 스스로 유도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 부정적 감정을 의도적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스스로 화를 돋우고, 일부러 슬픔을 연출하고, 불행을 가장할 수도 있다. 본말이 전도되는 것이다. 더불어 내가 무언가를 보고 들을 때 느껴지는 나의 감정, 자연스러운 반응을 인위적인 의도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재편한다는 것은 정서적 편향을 야기할 위험이 있다. 그러한 상태가 심화되면 내가 무언가를 보고 느끼는 것이 나의 감정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억압된 내적 양상인지 헷갈리게 된다. 내가 어떤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고, 자기 인식에 혼란을 초래한다. 이렇게 감정을 단순히 '무언가를 생산하는 에너지'로 뭉뚱그려 이해하는 것은 다양한 문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로운 에너지란 무엇일까? 그것은 신체적 활기를 비롯한 의식적 고양, 지적 성취에 따른 이성의 통제 능력이자 능동성의 결과이다. 사람이 현실에서 자신이 원하는 어떤 긍정적인 것을 산출해내기 위해선 일단 신체적 활기를 필요로 한다. 신체적 활기란 단순히 아름다운 몸매나 건강한 육체미를 말하는 게 아니다. 최소한의 운동만으로도 얻어지는 뇌기능의 향상, 장기 활동의 매끄러움, 혈액 순환과 근육 작용의 원활함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의식적인 고양, 즉 목표나 자신의 각오에 대한 당위가 필요하다. 단순히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 한다는 게 아닌, 그것을 왜 하고 싶고 어떤 맥락 속에서 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당신은 스스로 그것을 부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생각의 방향이나 깊이를 조절할 수 있는 사고의 통제 능력이 필요하다. 자제력이나 논리적 추론, 합리적 사고 능력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들의 총합이 높을 때, 우리는 원활하게, 뜻하는 바에 따라 능동적으로 에너지를 투자할 수 있다.


  이 중에 어떤 것은 본인이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은 하기 싫은 것일 수도 있다. 정말로 자신이 어느 한쪽으로 깊게 파고들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다면, 그렇게 해도 무방하다. 적당히 책을 읽고 적당히 운동한 사람보다 대단한 지적 성취를 위해 밤낮으로 시간을 쏟아붓는 학자의 열정이 더  에너지를 생산해낸다. 상기한 능력들에서 중요한 건 (물론 객관적인 수치로 표현할 순 없겠지만 대략적인 의미에서)총합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뤄낸 운동선수들은 하나 같이 자기 조절 능력이 탁월하고, 스스로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산출해낸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학자나 운동선수처럼 될 수는 없기에, 다양한 영역에서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어떤 분야든 노력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있고, 그 이상의 뭔가를 필요로 하는 경계가 있다. 전자는 누구나 조금의 투자를 통해서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에, 경계를 넘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여러 분야의 경계에 도달하는 것이 더 쉽고 효율적이다.




  사람들이 종종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에너지는 그냥 소진될 수도 있다.

  무의식적인 웹서핑이나 습관적인 게임, 기계적인 TV 시청 등이 그렇다. 우리는 그 같은 활동을 하면서도 에너지를 소비하지만, 여기서 소비된 에너지는 아무런 생산성도 지니지 못한 채 그저 사라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같은 것들을 우리가 하는 이유는 그 순간의 감정적 만족을 위한 것인데, 앞서 말했다시피 대부분의 감정은 일시적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일정한 시간을 소비하면서 그 시간 내에서만 통용되는 감정을 경험하기 위해 그 같은 일들을 하는 것이다. 그 시간대를 벗어나면 어떤 것으로도 이어지지 못할 그런 감정 말이다.


  그것이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과 '활용'하는 것의 차이다.

  에너지를 소비하는 건 그 순간에 국한되는, 미래의 무언가로 이어지지 않거나 혹은 아주 미미한 수준으로만 영향을 끼치는 행위 같은 걸 말한다. 에너지를 활용하는 것은 지금의 에너지를 통해 미래의 에너지, 혹은 그것을 조성할 수 있는 여타 능력들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걸 말한다. 이러한 '소비'와 '활용'의 대비는 '시간'에 대입해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소비 역시 필요하다. 중요한 건 언제나 균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이해하는 여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