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언어, 기호.
사실 우리가 언어로만 사고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정경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특정한 멜로디를 상상하는 것 또한 생각의 일종이라면,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제약하는 유일한 구조는 아니다. 하지만 언어가 생각을 표현하거나 교환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수단임에는 틀림없다. 혹은 '사고(思考)'를 단순한 생각 이상의 고차원적인 지적 활동이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대개 언어로 사고한다고 볼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언어 역시 기호의 일종이다.
여기서의 '기호'는 현실에 존재하는 실체 또는 어떤 대상을, 우리의 인지 작용을 통해 변환시켜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매개의 총체다. 즉, 기호는 일종의 은유다. 그것은 사람들 간의 약속을 통해 의미를 가지게 되며, 일정한 체계, 특정한 '코드' 내에서 공유된다. 패션도 옷차림에 대한 코드를 공유하는 일종의 기호 표현이며, 언어적 규범, 조직 문화, 제품에 대한 광고 연출이나 각종 유행 또한 어떤 대상에 대한 기호적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의 가치, 의미가 오직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들어있는 특정한 상상력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과를 좋아하십니까, 바나나를 좋아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가능한 대답은 둘 중 하나다. 사과나 바나나. 물론 다른 대답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쨌든 적절한 의사소통 방식이 아니다. 주어진 담화에서 벗어난 의사 표현은 대화의 범주를 지나치게 확장시킬 위험이 있다. 그것은 비효율적일뿐더러 심지어는 반사회적인 행동 양식이다. 서로가 공유하는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일정한 규칙을 전제한 채 다양한 상호작용을 이어가는 것이 사회성의 본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사람은 어느 경우에나 일정한 질서와 그가 속할 수 있는 상황 범주를 필요로 한다. 모든 외부적 조건에서 소외된 이는 점차 정신성을 잃어가고, 자아의 실감을 상실하게 된다. 감각차단 탱크의 예를 생각해보면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자연은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우리의 정신도 맥락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정신은 환각을 만들어서라도 일정한 양식을 유지하려고 한다.
언어가 제시하는 맥락은 이렇게 인간의 사고를 상당 부분 제약한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일상 속에서 상호작용을 할 때, 그 같은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훈련받아 왔다. 성인이 외국어를 '제대로' 배우는 일은 그래서 힘들다. 언어에 표현되어 있는 민족 단위의 전제까지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영어에서 be동사는 '있다'와 '이다'를 동시에 함축한다. 우리는 영어 문장을 보고 상황에 따라 그것을 둘 중 하나의 의미로 번역한다. 한글에는 '이다'와 '있다'를 동시에 함축하는 서술어가 없기 때문이다. 보다 섬세하게 구분되는 다른 단어들 역시 마찬가지다. 프랑스에선 치즈의 종류를 몇 백개 이상의 단어로 표현하고, 북극의 원주민인 '이누이트'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표현하는데 수 백 개 이상의 단어를 사용한다. 문화적 차이는 문화적 감수성의 차이를, 언어적 활용도의 차이를 야기한다.
당연히 이러한 차이가 문화 간의 우열을 나누는 기준으로 작용할 순 없다. 방점이 찍히는 분야가 다르고 사고의 틀을 제시하는 기준점이 다를 뿐,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은 저마다의 특색과 강점을 공유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특정한 문화권에서 공유되는 '사고의 경향성'이 보통 '언어적 코드'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그것을 거부하거나 보다 깊이 체화하는 방식으로, 언어적 코드의 전형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사고 체계를 형성할 수 있다. 요즘엔 특히 인터넷이 발달되어 있어 외국 문화의 단편적인 모습이나 특징, 관습 같은 것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으니 더욱 그렇다. 나아가 언어, 문화의 공시적 속성과 더불어 통시적인 맥락에서의 접근을 시도한다면, 즉 소위 고전(Classic)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들을 독해하고자 한다면 더욱이 풍부한 사고의 재료를 얻을 수 있다. 다른 시대성을 경험하는 일은 우리 시대에 만연해 있는 고정관념이나 편향된 상식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의 밑거름이 된다. 그러한 능력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부정적인 의미에서)꼰대'가 되거나, 2차 대전 당시의 나치 당원, 일제 시대 당시의 민족 반역자처럼 되는 것이다. 그들에겐 자신이 속한 시대의 논리나 상황 조건이 판단의 유일한 기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언어는 '문법적 기호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언어적 맥락 속에서 사용되는 모든 지시적 표현의 단어는 하나의 기호로써 작용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단어 그 자체와 그것이 지시하는 실체와의 관계다. 예컨대 '나무'라고 하면 누구나 그것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단어로서의 '나무'는 바깥에 서있는 그것과 어떤 '자연적인 관계'도 시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언어권에서의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기로 정했기 때문에 그 같은 기호의 형상으로 지칭되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같이 '나무'를 '느므'로 바꿔 부르기로 한다면 그것은 '느므'가 된다. 그 변화가 아리송한 사람들은 여전히 '나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겠지만, 모든 공적인 문서와 자료에서 '느므'를 사용하고, 세대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그러한 단어를 통해 교육받은 사람들에겐 그것은 무엇보다도 '느므'로 다가올 것이다. 어떤 지시체와 그것을 지시하는 단어와의 관계에 대해 이와는 상이한 내용을 주장하는 이론들도 있으나, 상식적인 이해의 선에서 논의를 진행하는데 목적이 있기에 여기서 다루진 않겠다.
기호는 또 다른 기호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확장성을 가진다. 그것은 은유적으로 표현되는 모든 것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 모양의 기호는 병원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고, 종교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병원이나 종교 시설 또한 그들만의 규칙(코드)과 언어적 표현(기호)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그들을 표현하는 십자가의 형상은 지시 대상에 대한 이차적인 기호라고 볼 수 있다. 기존의 함축적 특징(병원이나 교회)이 다른 방식의 함축(십자가)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이러한 기호의 확장으로 이뤄진 거대한 허구적 현실이다. 옷가지는 체온 보존과 노폐물 흡수라는 기능적 본질 외에도 자아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나아가 특정한 패션의 사조는 동일한 내용의 코드를 공유하며, 실제 사회 모습을 변화시키거나 심지어 주도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옷차림 자체는 아무것도 시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직물, 섬유 따위의 것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얽혀 있는 천 쪼가리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 천 쪼가리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적 기호'로 작동한다. 사람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내용과 의미를 함축하게 된다. 옷의 가치뿐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거래되는 모든 상품이 그런 식의 '기호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소비할 때 무엇보다도 그 같은 가상의 가치에 대한 값을 지불하게 된다.
기호는 매개일 뿐, 실체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 같은 허구를 실체로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행복의 기호로 표현되는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의 SNS 사진들은 예외 없이 인위적으로 연출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점점 더 사진 속 모습을 답습하기 위해 현실에서도 그와 동일한 움직임을 보인다. 그것은 'SNS 맛집은 다 사기야'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단지 SNS 속에서 통용되는 코드의 기호 표현을 거부할 뿐, 일상 속에서 여전히 다른 방식의 기호를 소비하거나 생산하고 있다. '연인 간의 데이트'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화 감상, 식사, 카페 등을 떠올릴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을 공유하는 행위가 데이트의 본질이라면, 앞선 예시는 그 단어의 본래적 의미와 아무런 실질적 연관도 없다. 단지 대부분의 사람이 데이트하면 그러한 행위들을 떠올리고,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표준처럼 작동하기 때문에 동일한 연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실체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건, 이게 부정적인 일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복합적인 문화 가치의 산출은 인간 고유의 능력이자 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같은 방식으로 사회를 보다 풍요롭고 다채롭게 구성할 수 있으며, 언어나 문화에 국한되는 상상력의 한계를 점점 넓혀갈 수 있다. 사고의 외연이 확장된다는 건 그 사회가 소화할 수 있는 세계의 범위가 확장된다는 것이고, 보편적 인식이 보다 성숙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허구에 너무 몰입하면, 삶이 공허해진다.
도구는 도구로써 인식하고 활용할 때 그 가치와 의미가 극대화된다. 도구에 자아를 투영하고, 그것의 본질을 망각하며, 온갖 치장을 곁들이면서 그것이 도구의 본래 모습이라 여기게 된다면, 그는 길을 잃을 것이다. 실체와 허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삶은 뭐든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분별할 수 없다.
삶에도, 세상에도 여전히 중요한 것들이 있다.
기호와 코드에 가려지지 않는, 그래선 안 되는 사실들도 있다. 그것을 판별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러한 분별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당위만큼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작용한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