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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Jan 22. 2021

'그런 사람'이 없는 세상

#7. 선악(善惡), 맹목성.


  세상엔 착한 사람들이 참 많다.

  가끔 놀라우리만치 이타적으로 구는 사람을 보게 된다.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력행사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사람들 덕택에, 사회의 균형이 지켜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에게 선한' 사람이 있을까.


  세상엔 악한 사람들도 참 많다.

  자극적인 내용을 퍼다날라야 하는 대중 매체의 속성상, TV나 인터넷을 보면 극악무도한 악행이 자주 보도된다. 보편적인 상식에서 이탈하는 걸 넘어서 극단적인 파괴를 일삼는 이들을 보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에게 악한' 사람이 있을까.

 



  선과 악에 대한 논의는 낡고 진부한 주제다. 그와 동시에 여전히 사람들의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분법이고, 현대 사회에선 도덕, 윤리라는 이름으로 이론화되어 꾸준히 연구되고 있는 가치다. 왜냐하면 선함과 악함이라는 개념의 규정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적용되는 현실 세계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다양한 사회 요소들이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충돌할 때, 우리는 새로운 중재 방식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다. 시대는 점점 발전해가고, 사회, 정치적 영역을 비롯해 우리의 실제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무언가로 변하고 있다. 20년 전만 해도 건물 어디에서나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지금은 다수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시설의 경우 대개, 얼마 없는 흡연부스 안을 제외하면 어디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 없다. 우리 삶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선과 악의 잣대는 계속해서 변하고 또 논의될 것이다.


  소박한 관점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굴도록 교육받는다. 법과 규칙을 준수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돕도록 요구받는다. 동시에 우리는 악한 행위가 무엇인지 금지를 통해 알게 된다. 사회문화적으로 집단마다 금지되는 범주나 대상이 다르긴 하지만, 세계화 시대인 만큼 문화권 간의 차이는 다소 희미해지고 있다. 사형제도 폐지 국가는 계속 늘어날 것이고, 사람들은 앞으로 동성애 결혼, 낙태 문제나 보편적 인권 사상에 더욱 관용적으로 접근하게 될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이제 많은 사람이 선과 악이라는 게 과거처럼 딱 나누어 떨어지는 개념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세상은 흑과 백이 섞여 있는 회색지대 같은 곳이며, 모든 행위나 선택을 일방적인 기준에 맞추어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과거에는 종교적 계시나 왕정의 절대권력에 의해 지엄한 명령으로 다가왔던 도덕에 대해, 이제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식의 냉소가 널리 퍼져있는 듯하다. 요즘 날에는 외려 '이익'이 모든 판단의 기준처럼 작용하는 것 같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감정적인 것이든, 행위자에게 최소한의 효용이라도 가져와야만 그의 판단은 올바른 선택으로 취급받는다. 말하자면 현대 사회의 많은 영역에서 이익이 '선'이고, 손해가 '악'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는 대중을 다소 냉소적으로 판단하는, 이론주의적인 관점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여전히 선함과 악함에 대한 오랜 유산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신의 이익과는 무관하게 타인을 돕는 사람들을 우리는 의인이라고 부른다. 이제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잘못되거나 천박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것에 집착하여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눈살을 찌푸린다. 주위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이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사람들은 항상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길 바란다. 나라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과거의 인물들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도 선(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음을 비롯한 어떤 극단적인 결말을 앞에 두고 있더라도, 그것이 그 이상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고 판단될 때, 비상식적인 결단력을 보이곤 한다. 무언가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일종의 맹목성이다. 대표적으로 종교적인 믿음을 맹목성의 예로 들 수 있다. 종교인들의 이상하리만치 강한 믿음 체계는 그러한 종류의 힘을 가지고 있다. 맹목성은, 꺾이지 않고 굳세게 나아가도록 돕는다는 의미에서,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부정적인 측면으로 접근하면, 맹목성은 사고를 제한하고 의식을 고착화한다는 점에서 삶을 다소 수동적으로 만드는 속성이다. 엇나간 맹목성은 불타는 타이어를 달고 드넓은 초원에서 악셀을 밟고 있는 것과 같다. 지나가는 모든 길이 불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그는 악셀을 멈출 수 없다. 그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멈춰서는 순간 불길이 자신을 집어삼킬 테니까. 고착화된 신념이 부서진다는 건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세계가 박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맹목성이 강할수록 더욱 그렇다. 하물며 선과 악 같은, 일반적인 행위의 기준이 되는 개념에 대한 맹목적 지향은 그의 인간성 전반을 조성할 정도다. 악한 맹목성을 가졌던 사람은 희대의 악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선한 맹목성을 가졌던 사람은 곳곳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혹은 타인에게 이용당하거나 배신당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특징적인 무언가를 시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결국 우리가 누군가를 선하다, 혹은 악하다고 판단할 때, 엄밀한 수준의 잣대를 사용하는 것 같진 않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두고 '이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긴 하지만, 객관적인 견지에서 볼 땐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게 쉽지가 않다. 심지어는 경우에 따라 그가 악인일지라도, 나 만큼은 좋게 생각해주는 것이 도리에 맞는 게 아닐까, 하는 식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랬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상황이 단순히 도덕적 무지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치부하기엔 어쩐지 석연찮은 점이 있다.


  예컨대 사람들은 종종 자격에 대해 논한다. 이 사람은 착한 사람이니 무언가를 받을 자격이 있고,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니 아무것도 누릴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식의 권선징악적 사고는 사회를 교훈적인 방향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에, 어떤 사람에 대해 착하다, 선하다고 평가했다가 나중에 전혀 다른 그의 면모를 확인하곤 한다. 거액의 기부자가 사실은 불법 시술을 일삼는 의사였다던가, 봉사 활동을 열심히 다니던 정치인이 사실 공직 비리의 주도자였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사람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 실제 현실에서 마주하는 사람들 외에, 자기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어서 보다 엄격하고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밀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하물며 감정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믿음에 따라, 어쨌든 많은 경우에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는 도덕적 표준을 가지고 있다. 어느 도덕 철학 서적에서나 소개될 복잡한 윤리적 딜레마 상황이라면 몰라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이나 대중 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공공 담론에 대해선 나름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사람은 어쨌든, 명백한 악인을 분별해낼 수 있다고. 예컨대 연쇄살인범이나 다중 전과자,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기꾼들을 우리는 악인이라고 규정한다. 나는 이들을 변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삶이라는 게 모든 찰나의 순간이 통합된 무언가라면, 사람이 누군가를 두고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모든 명제가, 나는 부적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타인의 말이나 행동을 두고, 그 사람의 '인격성'을 판단한다. 마치 그럴 수 있는 것처럼 군다. 능력적인 면에서나, 자격의 측면에서나 말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으니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는 적어도 저 사람에 비해 악인은 아니니 비판의 자격이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도대체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 사실 삶의 모든 순간에 선함을 유지하는 사람도 없고, 악함을 견지하는 사람도 없다. 선과 악의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논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안에 대해 도덕적인 평가를 내릴 때, 많은 경우에 근본적인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세상에 '착한 사람'은 없다. '나쁜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말하자면 삶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예컨대 많은 사람이 삶은 고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삶의 모든 순간이 고통은 아니었을뿐더러, 심지어는 감정의 총합을 분류해볼 때 고통이 더 많았다고도 하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생의 4분의 1은 자고, 많은 순간에 멍때리거나 기계적인 행위를 반복하고, 또 더러는 기쁘고 즐거운 순간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들을 정량화하여 판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누군가를 보고 착하다고, 나쁘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실 그의 인생에 있어 오로지 찰나의 말이나 행위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같은 말이나 행위가 백 번 반복돼도 마찬가지다. 그가 살아온, 살아갈 시간의 총량에 비하면 대개 티끌일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타인에 대해 내리는 종합적인 판단은 대체로, 성급한 일반화에 해당된다. 부분을 보고 전체도 그럴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이다. 혹은 심지어, 그러기를 바라기도 한다. 누군가 나쁜 짓 한 번 했다고 그가 때려죽여도 시원찮은 인간이길 바라기라도 하는 듯, 온갖 힐난을 쏟아내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엇나간 맹목성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죄는 그 사람의 말이나 행위가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고 판단될 때, 그것을 부르는 악명이다. 달리 말하면 죄는 그 사람 자체를 규정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 사람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멍에가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행위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시사할 뿐이다. 우리는 모든 순간에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없다.


  사람의 말이나 행위가 타인에게, 혹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 어떤 결과로 작용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선한 의도가 악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고, 악한 의도가 이롭게 다가올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식이 깨어 있는 매 순간에 선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뿐이다. '선'이라는 속성을 획득할 수 있는 공식 같은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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