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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Jan 31. 2021

거짓말쟁이 위선자

#9. 거짓말, 위선.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꼭 상대방을 속여먹으려는 의도가 아니더라도, 상황에 따라 불가피한 거짓말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 같다. 친구가 새로 산 옷을 자랑할 때, 내가 보기엔 별로인 것 같아도 예쁘다고 말하는 게 더 나은 상황처럼 말이다. 많은 경우에, 적절한 거짓말은 사회적 인간관계에 윤활유로 작용한다. 딱히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일 없는, 특별히 중요한 사안에 대한 입장이 아닌, 사실보다 상대방의 기분을 좀 더 고려하는 그런 거짓말들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은 여전히 도덕적으로 부당한 행위인 것 같다.

  거짓말은 그 본래적 의미를 고려할 때, 사실 정상적인 사회를 붕괴시킬 위험마저 있는 위험한 행위다. 예컨대 주위에서 만난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진실하지 않다는 가정의 상황을 상상해보라. 시간이나 날짜에 대해 묻고 답하는데도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해야 하고, 기본적인 의사소통이나 업무 처리에 필요한 진위 여부를 판단할 때도 문제가 발생한다. 아니, 애시당초 그러한 종류의 사회적 상호 작용이 사실상 사라질 것이다. 의사소통에 임하는 상대방이 대체로 진실하다는 가정이 없다면, 굳이 거짓말을 하진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누구와도 의미 있는 대화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거짓말도 허용해선 안 되는 걸까? 사회적 인간에겐 항상 진실한 태도를 견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봐야 할까?





  일반적으로, 소위 말하는 '나쁜 행동'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거짓말, 욕설, 고성방가, 쓰레기 무단 투기, 노상방뇨 등이 그렇다. 이러한 행동들은 사회적 해악을 키우고, 근절될 수 있었던 피해를 타인에게 무분별하게 입힌다는 점에서 대체로 부당하다. 하지만 보편적인 기준에서, 예외도 존재한다. 앞서 잠깐 언급한 선의의 거짓말이라던가, 신경학적 문제로 인해 불가피하게 욕설을 입에 담게 되는 경우라던가, 일반인보다 낮은 정신성을 가지고 태어난 이가 저지르는 일시적 일탈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문제 상황을 야기함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비판을 가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는 자신의 의도와는 별개로 일어나게 되는 것인데, 책임 소재의 근간은 (상식적인 의미의)자유의지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택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그와 관련된 개인의 잘못을 추궁할 수 없다. 감정적인 반감을 가질 순 있지만, 어쨌든 진지하게 책임을 물을 순 없는 노릇이다.


  또 다른 애매한 상황도 있는데, 그것은 선한 의도를 추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들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특히 선과 악이라는 기준이 다소 주관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강해서, 나의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행동이 타인에게는 불편한 것, 짜증 나는 것, 부담스럽거나 심지어는 부덕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나에게 해악을 끼치지만, 선한 의도에서 그런 것이라는 타인의 행동에 대해 나는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까? 사실 이는 비교적 단순한 문제다. 단지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상기시키면 된다. 당신의 의도에는 감사하지만, 거기서 비롯되는 행동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해결된다. 만약 상대방이 정말로 '선의'에서 그런 것이라면 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간 문제가 있다. 바로 상대방이 '선의를 가장하는 경우'다. 말하자면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모종의 의도를 감추기 위해 상대방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포장하는 경우에는 꽤 난감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엔 나의 기분이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해도, 되려 화를 내거나 혹은 아예 무시하고 계속 똑같은 행동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이런 식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선한 의도로 대하는 것이니까, 네가 설령 조금 불쾌해도 감수하는 것이 맞다. 말하자면 '예의'에 대한 왜곡된 견해로 상대방의 반응을 조종하려는 것이다. 꽤 독선적인 태도이지만, 의외로 일상 속에서 빈번하게 볼 수 있는 경우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들은 정당한 비판을 들어도 '당신 말도 일리가 있긴 하지만, 말하는 모양새가 좀 그렇다.'는 식으로 대꾸한다. 자신의 위선적인 태도를 인식하지 못하고, 본인이 상대방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오만에서 비롯되는 언사다.


  이러한 종류의 위선이 부덕한 태도라는 것은 상식적인 결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어떤 위선자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고, 상대방의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선하지 않은 의도로 말미암아 행동한다면, 그러한 태도를 부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사람들을 싫어하고, 심지어는 혐오하는데도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 이익을 얻기 위해,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처럼 구는 것은 부덕한가? 새로 산 옷이 예쁘냐고 묻는 친구에게, 옷 꼬라지가 대단히 너저분하고 바보 같지만, 괜히 말해봤자 들어먹을 생각도 안 하고 감정만 상할 테니, 대충 대꾸해주고 넘어가자고 생각해서 예쁘다고 말한다면, 이는 부덕한 태도일까? 만약 이러한 전모를 알게 된다면 물론 상대방은 기분이 나쁠 것이다. 그러한 위선자와 거리를 둘 것이고, 그를 '도덕적으로 하자가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차적으론 감정적인 반응이다.


  위선도 선이라는 말이 있다. 선하지 않은 본성을 지닌 무언가가 특정한 목적에 따라 선함을 가장하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위선적이라고 한다. 솔직함과 정직이 미덕이라면, 거짓말은 어떠한 경우에도 악행이다. 하물며 스스로 선한 의도를 가장한다면, 그것은 위선적 악행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의의 거짓말은 '사실의 왜곡에서 비롯된 해악'보다, 근본적으로 갈등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 상대방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의도의 실현에다가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선의의 거짓말쟁이는 자신이 선의라고 포장하는 자기 보호, 혹은 상황 회피를 진실한 태도보다도 우선시한 것이다. 추상적인 견지에서 보면, 이는 주체의 내면에서 일어난 주관적 가치 부여가 보편적 올바름을 꺾은 것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이 같은 관점은 다소 부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위선자 역시, 자신의 본래적 성향이나 감정을 덮어두고, 어쨌든 자신이 믿는 선한 사회적 가치를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의미로, 주관적 의미보다 보편적 행동 양상을 앞세운 것이다. 이는 일종의 희생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바에 따라, 자연스럽게 느끼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선호한다. 억압과 압제에 휩싸여 제한적인 행동 양식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스트레스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선은 선처의 여지가 있긴 해도 여전히 부당한 태도일까? 아니면 비판의 여지는 있지만 그래도 선한 태도일까?

 




  거짓말에 한해서, 나는 모든 종류의 위선을 부당한 태도로 본다. 친구가 새로 산 옷에 대해 예의상 예쁘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렇게 진심을 호도하는 모든 종류의 시도가 부적절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 번째는 사회적 의미를 근본적으로 왜곡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겉치레, 즉 '예의 바른 언행'이 사회에 만연할 경우, 그 사회는 근본적으로 외롭고 고독한 사회가 된다.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 보다 많은, 심지어 불필요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게 되고, 일상 속에서 사회 의례적인 태도와 그렇지 않은 것을 사실상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지금의 현대 사회에서도 역시, 누군가가 하는 말이 진심인지 겉치레인지 판단하기 위해서 많은 경우, 그저 자신의 믿음에 의존해 판단할 수밖에 없다. 저 사람이 하는 말은 진심일 거야, 혹은 저 사람이 하는 말은 겉치레일 거야, 그저 별다른 근거 없이 스스로 한쪽을 지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나중에 뒤통수 맞을 위험이나, 배신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설령 상대방의 기분을 고려한, 해도 별 영향력이 없으리라 판단되는, 심지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거짓말이라도 그것은 진실된 사회적 가치를 결과적으로 훼손시키게 된다. 어떤 칭찬이나 비판에 대해서도 왜곡해서 받아들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것이 개인의 인생에 끼치는 영향력 때문이다. 이는 특히 어린아이에게 하는 거짓말의 경우에 해당한다. 우리는 종종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들을 독려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나아가 정교한 허구를 꾸며내고, 사실과 무관하거나 반대되는 조언을 건네기도 한다. 아이의 자긍심과 목표 의식 따위의 것들을 고취시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어떤 거짓말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살면서 객관적인 피드백의 과정을 거칠 기회를 가질 수 없는 경우에, 그것은 그의 평생 가치관이 된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물로 손을 씻는 행위가 피부 겉표면에 있는 악마들을 죽이는 신성한 행위라고 말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부모는 아이에게 세상에는 나쁜 악마들이 많은데, 그래서 바깥에 나갔다 오면 반드시 손에 악마들이 묻게 되고, 그것을 씻어내야 비로소 착한 사람이 되면서 세상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손씻기를 독려하는 거짓말이다. 손을 씻는 행위가 개인의 위생에도 중요하니 선한 의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아이는 평생 그러한 관념을 무의식적인 단계에 집어넣고 살게 된다. 경우에 따라 결벽증에 걸릴 수도 있고, 악마 얘기가 허구임을 깨닫게 돼도 불결한 것을 보면 필요 이상으로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다. 이미 그 거짓말이 의식 속에서 잊혀진 뒤에도 말이다. 하물며 아이가 들은 거짓말이 이처럼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기초 과학 상식이 아닌, 보다 감정적이고 관념적인 거짓말이라면, 그는 평생 그 같은 허구적 요소를 은연중에 간직하고 살아가야만 한다. 이는 그것이 좋은 영향을 끼치든 나쁜 영향을 끼치든 부당하다.





  이렇게 말해도, 거짓말이 근절될 수 없음을 안다.

  심지어 줄어들지도 않을 것이다. 선의의 거짓말, 사회적 거짓말은 어쨌든 필요하다. 그 같은 것들이 그렇게 중요해서가 아니라, 대체로 인간이 그만큼 나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경우에서의 진실을 마주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사람은 자신의 인지 능력 이상의 진실을 감당하지 못한다.


  하지만 현실적인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대안이란 바로 침묵이다. 상대방이 하는 말에 동의하지 않거나, 무슨 말을 해도 문제가 발생할 상황 같으면, 그냥 조용히 미소 지으며 상황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굳이 주제에 대해 억지로 언급하려 하지 말고, 특정한 스탠스를 표현하려 하지 말고,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게 낫다. 정직한 사회의 모습은 아마 개인과 개인 사이의 내밀한 침묵이 익숙한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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