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각 Feb 09. 2021

생각의 좌표

#10. 지구, 우주.


  아주 먼 과거를 상상하다 보면,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진다.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이 그렇게까지 특별하진 않았던 세상, 권력자의 명령 한 마디에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는 상황, 항거할 수 없는 존재를 상상하며 벌벌 떨던 사람들, 그럼에도 살아가는 사람들, 웃고 떠들며 무언가를 즐기는 모습 등등. 가치관이나 이념, 사용하는 언어가 다듬어지지 않고, 대개 집단의 믿음에 따라 좌우되는 생활상 같은 걸 떠올리다 보면 다양한 형태의 자유주의가 유행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나로선, 마냥 낯설게만 느껴진다.


  참 지구적인 생각이다.

  타인의 말이나 어떤 조직 내에서 통용되는 규칙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가끔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눈을 부라리거나, 지역 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담론을 제기하거나, 자신이 껴안고 있는 티끌이 전부인 것처럼 구는 사람들을 보면서 말이다. 이렇게 말하니 '지구적'이라는 게 비하의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꼭 그런 의미로 사용한 건 아니었다. 우주는 너무 넓고, 세상엔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알아내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누군가가 세상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도 외부자의 시선으로 보면 "겨우?"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가치나 믿음에 우열이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고, 넓은 시야를 가질수록 바람직하다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종종, 막연한 환멸을 느끼곤 한다는 것이다.


 



  아주 멀리까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집에서 마트까진 얼마나 걸리고, 버스를 타고 어느 지점으로 가려면 얼마나 걸리고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내 일상을 차지하는 그 시간과 거리는 한국이라는 틀에서 보면 얼마나 짧고, 작은 것일까, 그런 생각도 한다. 그리고 그 한국이 좁디좁게 보이는 다른 나라는? 그 나라를 아우르는 대륙은? 그런 대륙 몇 개를 집어넣어도 메워지지 않을 것만 같은 바다는? 단순히 공간 차원의 '거리감'만 해도, 지면에서 멀어질수록 극적으로 아득해진다. 각종 이름이 붙은 거리만 거닐어도 숨이 차곤 하는데, 그 거리를 셀 수도 없이 이어 붙인 길이를 걸어서 횡단하면 어떤 기분일까? 걷는 내내 내가 미쳤지, 하는 생각이 들 것 같다가도, 그래도 꽤, 하는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그런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군대에서 일어난 일이었는데, 사건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어떤 병사가 높은 지위의 군인에게 경례를 하는데 실수를 했고, 그 군인은 병사가 속해 있는 부대의 장에게 눈치를 줬고, 그게 또 밑으로 언질이 가고, 그러다 보니 실수한 병사와 같이 생활하는 다른 병사들이 그를 극단적으로 폭행했다는 내용이었다. 오래전에 봤던 기사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군대라는 조직의 폐쇄적인 성격을 고려해보면, 흔한 일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다. 나 역시 특정한 형태의 규율이 작동하는 작은 조직에 있을 때,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나와 동일한 입장이었던 이들, 소위 말하는 '약자'들이 오히려 그 시스템에 감화되어 자발적으로 부조리함을 유지, 재생산하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환경은 사람들의 인식에 분명하게 영향을 끼친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환경'이 논의될 수 있는 건전한 방향성은 오로지 그것의 '정도'이지, '관계성' 그 자체가 아니다. 이는 가난한 집안의 자식들은 가난하게 살아가고,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은 부유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 외적인 부분에 대한 것이 아닌 정신이나 성격, 인지적 편향의 방향 및 정도, 세계관 같은 걸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 영향이 항상 영구적이진 않다. 우스갯소리로 군대에 가면 멀쩡한 사람도 바보가 되고, 착한 사람도 부조리를 하게 된다고 한다. 인식이 작용하는 세계의 범주가 한정적일수록, 그 바깥에서의 존재가 볼 때, 비합리적이라고 판단되는 패턴들이 확산되기 쉬워진다. 일종의 전염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일정 부분, '세뇌'처럼 작용하기도 한다. 다양한 환경 요소들이 그 속의 사람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것에 저항하는 건 물론 가능하지만, 그 경우 저항 또한 어쨌든 '환경적 요소들에 반대'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물리적인 의미든, 추상적인 의미든 간에 공간은 산발적으로, 그러나 특징적으로 사람의 시야를 제한한다. 물론 그것이 항상 부조리하게 작용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극복되어야 하는 적폐 같은 것도 아니다. 너무 넓은 시야는 사람을 산만하게 만든다. 혹은 적어도 혼란스럽게 만든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볼 땐 저런 짓을 왜 하나 싶다가도, 정작 그 안에 들어가서 공통된 목표를 위한 최적화를 구성하려고 하다 보면, 아, 여기선 이렇게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구나, 하고 깨달을 때도 있다. 사실 많은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려는 나머지,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경우에 직면한다. 이걸 하려면 저게 필요하고, 저걸 하려면 그게 좋고, 뭐가 더 효과적이고 어쩌고 하다 보면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치는 것이다. 그냥 일단 시작하라는 말이 조언이랍시고 통용될 수 있는 이유도, 사람들이 실제로 뭔가를 실행하는 것 자체를 지나치게 높은 기준으로 평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완벽주의의 폐해다.


  누군가는 우주를 보며 인간 존재에 환멸을 느낀다. 이 드넓은 우주에 비하면 나라는 사람은 한낱 티끌에 불과하고, 내가 아등바등 사는 삶이란 찰나에 국한되는데, 뭐하러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을 보면서도 참 지구적인 발상이라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그는 존재의 밀도를 판단하는 기준을 그가 편입되어 있는 공간의 크기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러시아의 허허벌판에 비하면 나의 도보 가능 범위는 좁쌀만한데, 뭣하러 이렇게 땀 뻘뻘 흘리며 걸어 다니는 걸까, 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너무 좁은 시야는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들지만, 너무 넓은 시야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보통, 둘 다 사람을 비합리적인 상태로 접어들게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우리는 지구에서 사는 걸까, 우주 안에서 사는 걸까? 나 같은 경우에는, 아주 멀리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의 범위가 공간적으로 나타나진 않는다. 아득히 멀어서 그렇다기 보단, 어쩐지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이나 타국의 관광명소로 가고 싶다거나, 우주여행을 하고 싶다는 느낌이 아닌, 말하자면 우주가 아닌 어딘가로 가보고 싶다는 기분이다. 그곳은 아주 멀다는 의미에서 우주 바깥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우주를 시야 안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꽤 신비주의적인 인상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선 '과학적인 진술 방식'이 아니라면 다 헛소리로 치부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런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이라던가, 공간 없이 흐르는 시간이라던가, 그런 개념의 이미지를 상상해보는 일은 비생산적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순간에는 나의 인식을 어딘가로 이끌어 준다.





  어떤 사람들은 남들이 하자는 대로, 환경이 주어진 대로 산다. 어떤 사람들은 환경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거나 배척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과 생각을 특정한 곳에 위치시킨다.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서 말이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아마 생각의 좌표를 특정하는 시야의 넓이를 적절하게 조율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지구적인 생각이라고 무시하거나 얕잡아 보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생각이라고 허무하면서도 우울한 공상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그들 중 하나를 골라 사용하는 것이다. 실행과 반복이 필요할 때는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좌표의 범주를 좁히고, 성찰과 반성의 자가 피드백이 필요하면 좌표의 범주를 넓히는 방식으로 말이다. 당신은 당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어디에 존재하는지 선택할 순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점유하고 있는 그 자리를 어떤 너비 안에서의 좌표로 인식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정신승리하라거나, 왜곡된 인식을 통해 감정적 위안을 얻으라는 게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생각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몸을 움직이거나 그를 통한 활동을 할 때, 그 움직임이나 규칙성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똑같이 따라 하면서 연습도 해보고, 다양한 방식의 분석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렇게 신체 능력을 숙달시킨다. 하지만 '생각'에 대해선 도통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그저 '자연스럽게 내버려 둔 상태에서 흘러가는 대로 떠오르는 생각''가다듬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긴다. 그것은 마치 축구를 하는데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근육의 활동성이 나타나는 결과를 고려해, 몸의 위치만 변화시키려는 시도와 같다. 그런 식으로 축구를 잘하려다간 골대 앞에서나 경기장 중앙에서나 똑같은 방식으로 흐느적댈 뿐이다. 인식의 좌표를 인지하는 것은 자신이 어떤 공간의, 얼마큼의 너비를 커버해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다음에 우리가 할 일은 육체적 운동을 하는 것처럼, 정신적인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조작하면서 상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지구에서 살든, 우주에서 살든 말이다.




 

  아주 먼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다른 의미로, 기분을 이상하게 만든다.

  예컨대 내가 무언가를 쓰다 만 종이 쪼가리가 먼 미래에 발견되면, 누군가는 그것을 진지하게 분석하거나, 그를 통해 사회상, 지역적 특징 같은 것을 연구할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지금 내가 부단히 애쓰고는 있지만, 그다지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계속 전해지다 보면 뭔가 중요한 의미를 가질지도 모를 일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말이다. 그러한 기대를 품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으로서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바라던 아주 먼 곳에 도착하게 된다면,

  일단 나는 하염없이 걸을 것 같다. 잠이 올 때까지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거짓말쟁이 위선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