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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Feb 12. 2021

'지식인'과 '지성인'의 차이

#11. 지식, 지성.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A를 아냐고 묻는 질문에 그것을 안다고 대답하려면,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할까?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기준이 있기나 할까? 나는 바나나에 대해 알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알 것이다. 하지만 바나나의 성분이나 입자 구조, 재배 환경이나 유통 과정, 이름의 어원이나 체내 작용 같은 것들을 꿰고 있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 것이다. 드물겠지만, 물론 그런 사람도 있긴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나나'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만 갖추고 있는 나와 그 사람 간의 '앎'의 차이에 대해 우리는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까? 나는 '모르고' 그는 '아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내가 그보다 '덜 알고 있는' 것일까? 혹은 어쨌든 동일한 지시 대상을 떠올릴 수 있으니, 그냥 '동등한 수준의 앎'이라고 봐야 할까? 극단적인 회의주의자라면, 둘 다 바나나에 대해 '알 수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깊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성숙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나 올바른 식견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마주할 때, 보통 그의 생각이 깊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생각이 일종의 사슬 구조처럼, X에서 Y로 옮겨가는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만, 땅굴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생각의 흐름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생각, 의견을 내놓을 때, 듣는 사람이 언어적으로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청자는 그와 관련된 생각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땅굴을 파는 과정 없이, 일정 지점의 깊이에 곧바로 도달한 게 된다. 혹시 생각의 밀도라는 잣대가 객관적으로 존재해서, 그것을 평가할 수단이 있는 걸까? 피상적으로는 같은 높이의 땅굴에 도착해도,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의 차이에 따라 안정성에서 차이가 나는 느낌일까?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어쩐지 지적 우월주의의 냄새를 풍기는 듯하다.


 



   똑똑하다는 말은 범용성이 꽤 넓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누군가가 많이 알고 있을 때, 즉 다양한 지식을 많이 보유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보고 똑똑하다고 한다. 이 경우, 그 사람은 그가 소유한 지식의 양에 따라 평가되는 것임으로, '똑똑하다'는 '부유하다'는 맥락으로 사용된다. 단적으로 당신이 상대방보다 더 많은 외국인 이름(가능한 저명한)을 댈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당신은 똑똑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혹은 지적이라거나, 지식인이라거나, 하는 소릴 듣게 될 것이다. 대개 지식인이라는 건, 일반적인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접할 기회가 별로 없는 정보들을 나열할 수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 정보가 단순 암기된 것이든, 혹은 오랜 이해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든 말이다. 언어로 구술되는 단편적인 정보들은 그러한 구분을 자발적으로 해내지 못한다.


  다소 정형화된 형태인 '지식'에 반해, 우리는 '지혜'라는 개념 또한 사용한다. 누군가를 지혜롭다, 현명하다고 말하는 건 단순히 지식의 총량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적절한 판단을 내린다는 것, 사태나 상황을 특정한 방식으로 조율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문제 상황에서 적절한 해결 방법을 내놓으려면, 일반적으로 그만큼 포괄적인 경험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사회, 즉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란 과학적 지식이나, 실험실에서 통용되는 엄밀한 법칙들과는 달라서, 접근의 융통성과 사안의 비합리성, 문제의 모순 같은 것들마저도 받아들이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쨌든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도 같이 사회 안에서 살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종류의 갈등 상황은 보편적이라기보단 특수해서, 그 안엔 직접 경험할 때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요령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어떤 사회에서든 일반적으로 노인들을 현명하다 평하고,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서 그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들의 판단이 항상 옳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요령'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선 특히, 지식인을 보다 높게 쳐준다. 복잡하고 다원화된 우리네 사회에 필요한 건 개별적 경험에서 도출되는 '요령'이 아니라, 복합적인 기계 설비를 도와주는 지식, 첨단 기기를 생산하고 조작하는 지식,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객관화된 지식이기 때문이다. '전문 지식'을 갖춘 이들은 그래서 항상 환영받는다. 이젠 사람들 사이의 일을 조율하는 일마저 '경영학'이나 '경제학'의 이론, 나아가 '심리학'의 연구에 따라 그 방향성이 좌우된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특정한 전제를 내세우는 특정한 '지식'이 현실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것은 지식을 통해 절대다수를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사람들에게만큼이나, 연구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대중'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그것은 말하자면 인간이라는 종(種)이 사회에서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방식을 제공한다. 관찰자에게나, 관찰 대상에게나.


  심지어 전통적인 의미의 지혜는, 다소 부정적인 멍에를 쓰고 있다. 그것은 많은 경우에 독선이나 고집, 편협함이나 편향으로 인식된다. 일종의 '나이 든 완고함' 같은 것으로 말이다. 물론 세상에는 자기만 옳고, 자기가 겪은 것만 진리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남을 깎아내리고, 자신의 과거를 대단히 가치 있게 평가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심지어 그들에게조차, 조금의 너그러움만 발휘할 수 있다면, 적어도 하나의 요령은 배울 수 있다. 그 '나이 든 완고함' 속에 깃들어 있는 어떠한 작용, 사실 관계, 사회 내에서의 수완 같은 것을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은 그런 종류의 지혜를 수집하느니, 전문화된 지식을 얻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한다. 개인의 감정과 주관이 깃들어 있는 특정한 의견보다야, 다양한 연구와 접근을 소화한 하나의 이론이 더 보편적인 사실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반면 지혜와 구별되는 의미에서 '지성'은, 오히려 지식보다도 더 보편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사용되는 '지성'의 의미는 말하자면 '보편적인 지혜'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은 특정한 능력을 일컫는다. 예컨대 사람은 저마다 나름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고, 그것들 사이의 가치 우열을 평가하는 건 어렵지만, '지식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능력'은 일괄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다른 예로, 어떤 이론에서 A와 B사이의 관계가 규명되어 있고, 당신이 그 이론을 이해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A와 B사이의 관계를 고려하여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애당초 당신이 '개념과 개념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면, 특정한 이론을 배우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A와 B 사이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추론 능력이라고도 불리고, 통찰력이라고도 불린다.


  앞서 제시한 몇 가지 예시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 여기서 '지성'은 우리가 뇌를 사용할 때 직접적으로 작동하는 특정한 능력의 성질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식인'과 '지성인'은 다르다. '지식인'이 되고자 한다면, 그저 많은 정보를 기록하고 외우기만 하면 된다. 마치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하면 관련 정보가 출력되는 데이터 산출 기계처럼 말이다. 반면 '지성인'이 되고자 한다면, 지식의 보유 여부를 떠나서, 일정 수준 이상의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소위 말하는 비판적 사고 능력이나, 자신의 생각을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 미지의 상황에서 규칙을 찾아내는 능력, 스스로 생각하여 고유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지성인의 예는 자신의 의견을 다른 이론이나 타인의 말에 기대지 않고 설득력 있게 개진하는 일부 평론가나, 작가, 정치인이나 심지어 지식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식'과 '지성'이 항상 상반되는 개념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많은 경우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내가 여기서 지식인과 지성인을 다소 대조적으로 묘사했다고 해서, 지식이 지성보다 열등하다거나, 일반적인 의미의 지식인이 소위 말하는 '헛똑똑이'라는 것은 아니다. 생각하는 힘을 기른다는 건 개념과 개념을 연결하는 힘을 기른다는 것이고, 알고 있는 사실들을 통해 아직 모르고 있었던 무언가를 유추할 수 있는 힘을 기른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타인의 말이나 사용하는 어휘, 책의 글귀나 이론가의 전문 용어에 기대지 않아도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자, 정형화된 패턴에서 벗어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최선을 찾아갈 수 있는 지적 태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지성'은 그것이 돋아날 양분을 필요로 한다. 당연히 더 정확하고, 더 많은 지식 체계를 갖추고 있을수록 그것들을 배우는 과정 속에서 상술한 능력들이 길러지기 쉽다. 책을 읽으라거나 비판적으로 사고하라는 통속적인 조언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지성의 총체적인 요소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과 지성은 그러한 의미에서 긍정적인 상관관계가 있지만,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습관이나 성격 같은 것을 조절하는 데 애를 먹는다. 아무리 많은 전문 지식을 갖추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인간 심리의 작동 방식을 꿰고 있는 심리학자도, 인간 행동 원리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경제학자도 그렇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안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뿐더러, 단순히 지식으로써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을 '체화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살면서 책 몇 권 읽어본 적 없음에도, 더없이 온화하고 긍정적이며 위트 있는 중졸자를 본 적도 있고, 이상하리만치 불안정하며 독선적이고, 공격적인 교수도 본 적이 있다. 지성의 핵심은 스스로 생각하는 데 있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건, 살면서 보고 느끼는 사실과 감정에 대해 스스로 솔직해질 수 있고, 암기한 무언가를 떠올릴 필요 없이 자신의 견해를 자연스럽게 풀어낼 수 있는 내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안다는 것'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물론 설명할 순 없지만, 알고 있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긴 하다. 하지만 적어도 타인에게 무언가를 '안다고 표현'하려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있어 설명할 수 없다는 건 모른다는 것과 똑같다. 그러니 설명할 순 없지만 안다는 사실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타인을 원망하지 말고, 어떤 철학자의 말마따나, '말할 수 없는 것엔 침묵'해야 한다.


  생각이 깊다는 것은 깊은 결과물을 내는 게 아니라, 그럴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가 땅굴의 어느 지점에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게 아니라, 어떤 땅에서든 그만큼의 깊이를 홀로 파내려 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검색과 독서를 통해 밀도 있는 정보를 손쉽게 취득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을 인용하는 게 그가 생각이 깊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인용한 정보의 출처에 해당하는 인물의 생각이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적절한 인용 능력은 특정한 능력을 시사하긴 한다. 또 다른 철학자의 말마따나,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 이는 지성의 영역에서도 유효한 명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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