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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Feb 14. 2021

사회적 유대의 재생

#12. 시선, 관심.

  

  모든 사람은 일정 수준 이상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

  과거의 나는 이 사실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타인의 관심이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독립적이고 성숙한 자아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가 지속될수록 사람은 점점 폐쇄적으로 변해가기 마련이다.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고, 다른 사람과의 감정적 유대 관계를 배척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사회적 자폐(自閉)'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자폐는 단기적으로 볼 땐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일 수 있으나,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여기서 '관심'은 눈에서 시작되는, 신체적 의미의 '시선'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어떤 대상을 마음으로 돌보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낸다. 꼭 먹여 살리지 않더라도, 감정적 결핍을 충족시켜주려 하지 않더라도,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더라도, 그저 자신의 신경을 할당하여 상대방의 안위를 살피고, 지켜보고자 하는 마음. 그가 고립무원 상태로 유폐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소박한 증거. 사람에겐 그런 관심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말이다.


  



  특정한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 건전한 관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선은, 여러 의미에서, 대상에게 폭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것은 우선 상대방을 '규정'한다. 내가 무언가를 '어떤 것'으로 인식하여 본다는 건, 나의 의식 속에서 상대방의 상태를 특정한 형태로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용이 사물을 향해 작동할 땐 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책상을 책상이라 인식하고, 의자를 의자라 인식한다고 해서 그들이 별안간 극적인 변화를 야기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을 향한 인식의 고착화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를 일으킨다. 어제는 치킨을 좋아하던 사람이 오늘은 싫어할 수 있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카페를 즐겨 다니던 사람이 이번 주에는 한 번도 가지 않을 수 있다. 더없이 신사적이고 젠틀하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망나니처럼 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들에서, 어느 한쪽이 다른 경우에 비해 '예외적인' 모습인 걸까? 혹은 평상시와는 다른 '숨겨진 본모습'이 나타난 걸까? 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단지 그 다양한 양상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 인간은 복합적인 존재고, 그 복합성 전체를 조망하는 단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믿음은 허상이다. 그렇기에 대단히 넓고 포괄적인 범주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를 특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규정하는 일은 대개 부당하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어떤 시선과 그의 상태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어제도 치킨을 좋아하고 오늘도 치킨을 좋아한다면, 그런 사람을 두고 '치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상식적이면서도, 사소한 규정이다. 이렇게 지엽적이고 특수한 사실 관계를 판명하는 시선은 어떨까? 이 또한 부당하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이런 종류의 인상은 상대방의 인격성 전체를 조망하는 단서로 작용될 일도 없고, 직관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니 용인될 수 있는 '규정'이라고 봐야 할까? 그렇지 않다. 나는 어떠한 특징적인 면모가 그 사람을 구성하는 데 있어 주요하든 아니든, 그러한 것들을 일종의 소설 인물 설정이나, 캐릭터 카드 스탯창에 나와 있는 고유한 설정값으로 상정하는 태도에 반대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규정은 타인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상태를 작위적으로 고정시켜, 규정자로 하여금 받아들이기 쉽게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것은 '효율적'일 수 있지만, '폭력적'일 수 있을뿐더러, 정당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사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변할 권리가 있고, 자신에게 주어진 설정값을 벗어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맥락에서 시선은, 대상을 '조작'하려고 한다. 스토커나 관음증 환자의 예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런 종류의 도착적인 시선은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행동을 작위적으로 만들고, 신경 쓰게 만들며, 경우에 따라 불안하게 만든다. 사람은 관심이 필요한 만큼이나 개인적인 공간을 필요로 한다. 타자의 시선은 특히 신체적인 의미에서, 대상을 '감시'한다.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자유로운 기분을 박탈하며, 언제든 사적인 폭로를 감행할 준비를 마친 상태로 그를 지켜본다. 이러한 시선은 대상의 안위를 고려하지 않는다. 본연의 의미에서,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충족감을 위한 이기심의 발로이며, 자기 자신의 독선적인 세계만을 돌보려는 일종의 폐쇄성이다.


  내가 '조작'과 '감시'를 범죄적 수사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고 해서, 이러한 '시선의 부정적 특징'이 특수한 범법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잠재적인 맥락에서 이러한 특징은 보편적으로 확장되어 왔고, 지금도 계속 확장되고 있다. 예컨대 우리는 보통의 사람이 영상으로 스트리밍 되는 모습을 지켜본다. 유튜브에서, 기타 방송 플랫폼에서 타인이 보여주는 자신의 일상을, 생활 공간을 관람한다. TV에서는 유명인의 집에 카메라를 설치해 그들의 행동을 관찰한다. 그리고 관찰하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공공연히 방영한다. 물론 이렇게 관음(觀淫)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대개 자발적이다. 그만큼의 보상을 받거나 기대하며 스스로 관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많은 경우에, 이러한 관음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향하기보단 아마 조작된 모습, 작위적인 행태를 소비하는 방식으로 충족될 것이다. 하지만 거짓말도 반복되면 진실이라 믿게 되는 원리처럼, 작위와 기만, 관음이 판치는 세상에선 설령 그것들이 허구적인 구조 안에 배치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사람들은 점차 그들을 분별할 기준을 상실하게 된다. 단적으로 말해, 만약 당신이 육아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한 번이라도 '나도 우리 자식들에게 저렇게 해주고 싶었는데.' 라며 자책한 적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허위와 진실의 가치가 역전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내가 부정적으로 묘사한 '시선'에 대해, 당신은 단지 극단적인 폐단을 꼬집은 것일 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소소한 수준의 '시선 처리'는 대상을 응원하고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긍정적인 관심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누군가를 좋아해서 그가 뭘 하고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게 보편적인 욕구임은 분명해 보인다. 연애를 할 때면 사람은 연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별다른 의도나 목적이 없더라도 말이다. 이렇듯 무언가를 궁금해하는 것이, 꼭 그것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발상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그리고 보통, 실제로 관음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넓은 의미의 방송인이나 셀럽인데, 이들은 대중의 관심과 관음도에 따라 현실에서의 삶의 질이 결정되는 부류에 속한다. 그러니 내가 '폭력적'이라고 규정한 시선이, 실은 많은 경우에 응원이나 좋은 관심으로 작용한다는 주장은 얼핏 일리가 있어 보인다.


  먼저 이 점을 지적해야겠다. 보편적이고, 때론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그러한 이유'로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남성이 여성을 보고 성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은 대단히 보편적이고, 심지어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거나,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건 보편적이지도, 당연하지도 않다. 많은 경우, 그것은 '용납'될 수도 없다. 자신이 누리는 권리나 이익에 대해, 별다른 대가를 지불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은 원초적이고 당연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부당하다. 권리에는 의무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회적 가치의 균형을 항상 중요하게 여겨왔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를 '규정'하고, '조작'하고, '감시'하고자 하는 마음은 본능적인 것, 보편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은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욕구의 변형이다. 상대방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 의존하고 싶은 욕구, 물건처럼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가 완화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욕망은 건강하지 않다. 적어도 성숙한 태도는 아니다. 단순히 그것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립(自立)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내가 긍정적이라고 정의하는 '관심'은 상대방과 24시간 내내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지향하는 감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상대방을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으로 인식한다는 건, 그를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독립적인 주체로서 상대방이 자신의 일상을 다양한 형태로 꾸려나갈 권리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를 고정된 무언가로 규정하지 않고, 그에 대한 끝없는 이해의 과정을 수행할 의지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치킨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어제 치킨을 먹었고, 오늘도 치킨을 먹은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 섣불리 예측하거나 속박하지 않고. 내일은 자장면이나 족발을 사 먹을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인지하는 것, 그것이 고유한 존재로서의 사람에게 긍정적인 관심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이는 당연히 상대방을 '규정'하고, '조작'하고, '감시'하려는 마음과 맞서 싸우고자 하는 성숙함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상대방을 존중하려고 해도 어떤 경우엔 그의 행태를 내가 바라는 대로,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통제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감정이나 생각을 가지는 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책할 필요 없다. 다만 건강한 관계를 지향하는 자라면, 그 지점에서 투쟁을 선택해야 한다. 상대방이 내 기대대로 움직여주지 않더라도, 내가 모르는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려고 하더라도,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성토하는 일 없이, 그를 수용하고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 눈의 초점을 고정시키고 시선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마음으로 응원하고, 상대방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언제나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자 하는 의지. 우리 사회에,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관심이란 이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외로움이나 고독은 관계의 부재에서가 아니라, 관심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많은 사람이 서로를 소유하고, 착취하고, 사용하고 싶어 한다. 그런 기계적 이익 교환이 전제되는 관계가 '성숙한 관계'라고 생각하고, 또 이러한 관계들이 만연한 세상이다. 앞선 의미의 '성숙한 관계'에선,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여기서의 기준은 '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어떤 '고려'가 당장은 상대방에 대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을 뜯어 살펴보면 대개 자기중심적인 판단과 관점을 전제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여전히 일정 부분, 자폐적이다.


  물론 '나'는 중요하다.

  이번 챕터에서 언급한 '자폐'는 완전히 종식될 수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나'의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헌신하고, 희생적으로 관계에 임하라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믿고, 그 믿음을 위해 노력하고, 노력하는 만큼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긍정적인 관심을 쏟는 일이 오롯이 상대방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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