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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Feb 22. 2021

게임적 사고: 목표 수립, 행동 전략

#13. 게임, 전략.


  나는 어떤 일을 생각할 때, 그것을 '게임'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게임'은 흔히 하는 유희적인 오락이 아니라, 특정한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일의 단위이다. 승패가 나뉘는 일반적인 정의에 따른 것도 아니고, 학술적인 의미나 어떤 고유한 명칭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게임의 정의에 부합하는 다른 범용적인 용어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게임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다만 결코 가벼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하고 싶다. 나는 내가 더없이 진지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도, 효율적인 사고를 위해 게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모든 게임에는 전략이 필요하다.

  좋은 전략은 게임에 내포되어 있는 '특정한 목표'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냐에 따라 결정된다. 투입되는 비용, 즉 시간이나 돈, 감정이나 노력 같은 것들을 최소화하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전략이 일반적으로 좋은 전략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여기서 내가 사용하는 게임, 전략이라는 용어는 보편적인 진리를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들의 쓰임새는 오히려 아주 특수하고 지엽적이며, 개인적인 경험이나 삶에 직접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는, 일종의 요령 같은 것이다. 같은 종류의 게임이라도 사람마다 설정한 목표가 다르며, 그 목표에 이르는 전략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다. 탁월한 게이머는 전략 간의 우열을 자신의 필요와 기준에 따라, 재빠르게 파악한다.





  앞서 소박하게 정의된 '게임'은 거의 모든 일에 적용시킬 수 있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일은 기본적으로 특정한 목표, 결과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인문학을 공부한다면, 세상사에 대한 지식이나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단순히 남들 앞에서 잘난 척을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관련된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인문학을 공부하는 일은 하나의 게임이지만, 목표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종류의 게임이 된다. 목표가 달라지면 게임의 진행과 그에 걸맞은 전략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적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인문학 공부라면, 차근차근 근본적인 원리 체계부터 시작해 세부적인 개념들의 의미 파악으로 뻗어나간 뒤, 그들 간의 관계를 종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잘난 척을 위해서라면 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이나 몇 가지 개념어의 사전적 의미를 암기하면 된다. 자격증 취득을 위해서라면 해당 시험의 문제 유형을 파악하고, 그에 맞춰서 공부할 파트를 시간 계획에 맞춰 적절히 분배해야 한다.


  유희적인 게임에는 '운적인 요소'와 '실력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전자는 나의 노력 여하와는 상관없이, 무작위로 형성되는 변수를 지시한다. 후자는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절대적으로, 혹은 대단히 개연성 높게 영향을 받는 변수를 의미한다. 모든 게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이를테면 룰렛은 운적인 요소가 극한으로 발휘되는 게임이고, 바둑은 실력적인 요소가 극한으로 발휘되는 게임이다. 그 사이에 있는 여타 게임들은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에 따라, 운과 실력의 요구치가 적절한 비율로 섞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는 자신의 운을 실력으로 여기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실력을 운으로 여기기도 한다. 둘 다 불충분한 인식이다. 어디까지가 실력이고 어디까지가 운인지 파악하는 게 이런 게임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는 내가 설정한 '게임'이라는 용어에서도 적용되는 구분이다.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사람들은 온갖 형태의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게임의 모든 요소가 그의 노력에 따라 좌우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최선의 선택만 취했는데도 실패할 수 있다. 이런 경우, 당신은 좌절스러운 결과를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전략적 선택이 잘못됐다고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좋은 전략이 항상 좋은 결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좋은 전략은 운적인 요소의 개입도 어느 정도 고려하겠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행동 양식을 세우는 것이다. 당신은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실패가 '최선을 다하는 게 부적절한 전략이라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만약 게임이 끝나고 기존의 전략을 피드백하는 과정에서, 나의 전략과는 무관하게, 무작위로 작용하는 우연적 요소에 따라 문제가 발생했다고 여겨진다면, 그 전략을 섣불리 폐기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예컨대 모든 게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선 실패했던 전략이, 그보단 조금 나은 상황 조건에서는 똑같이 실행돼도 성공할 수 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전략의 시작점에선 단순히 '성공'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의 최선'을 극대화하는 게 중요하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게임과 전략이라는 사고의 틀은 무엇보다도 작업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그것은 게임에 참여하는 이들로 하여금 보다 명료한 상황 파악을 가능하게 하고, 목표에 대한 인식을 또렷하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게임이 '효율성을 중시하는 작업'에만 적용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인간관계를 게임이라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 인간관계 자체에서 어떤 작업적 효율성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그것의 추상적 특징이나 구성 요소를 고려해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향해, 관계를 유지·발전시킬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어떤 사람과의 관계냐에 따라서 목표 설정이 달라질 수 있다. 연인 간의 관계와 부모 자식 간의 관계, 직장 동료 사이의 관계의 목적이나 지향점은 제각각 다르다. 즉, '어떤 인간관계'인지에 따라 '인간관계'에 대한 동일한 범주의 게임이라고 해도 전략은 달라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관계'에 해당하는 '절대 전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랑하는 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사랑의 절대 전략'은 없다. 전략은 게임의 분류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요소들의 실체에 의존한다. A가 사랑의 핵심을 다른 것보다도 육체적 쾌락의 실천이라고 본다면, A와 사랑하고자 하는 이는 그 같은 요소를 게임의 핵심으로 삼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 B가 사랑의 핵심을 주기적인 연락과 언어적 표현이라고 본다면, B와 사랑하고자 하는 이는 잦은 연락과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감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게임적 사고방식에는 주의해야 할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게임 설정은 본인의 머릿속에서 시작되는 일종의 사고 도구이다. 그러니 상대방 역시 자기가 설정한 게임 상황의 플레이어라고 섣불리 가정해선 안 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만약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이 '사랑'을 하나의 게임으로 인식하고, 이 게임의 궁극적인 목표를 결혼이라고 설정한다. 그래서 그 게임의 목표에 맞게, 자신만의 '좋은 전략'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애당초 상대방은 그 게임에 참여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참여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즉, 상대방은 결혼을 목표로 당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 수도 있고, 아예 사랑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똑같은 지시 대상에 연루된 사람이 둘 이상일 때, 서로 그 지시 대상에 대해 설정하는 게임이나, 수립하는 전략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이 상이한 관계 설정을 두고 분노하거나, 서운해하거나, 실망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당신의 게임에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는 건 아니다. 적어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다.


  둘째, 대부분의 경우, 당신 역시 언제든지 게임에서 벗어날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게임적 사고방식은 내가 어떤 게임을 할지, 어떤 전략을 수립할지에 계획하는 것에도 도움이 되지만, 상대방이 어떤 게임을 하고 싶어 하고 어떤 전략을 세우고 있는지 파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설령 그가 문자 그대로 '게임'이나 '전략'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생각하진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때, 당신은 상대방이 진행하는 게임에 참여하고, 또 참여하고 싶을 수 있다. 만약 당신이 그의 게임을 잘 파악하고 결정하기만 한다면, 둘은 동일한 게임과 목표를 공유하는 셈이니, 훨씬 효과적인 성취를 이뤄낼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인이 게임에서 벗어나는 순간, 상대방의 규칙이나 전략이 나에게 별다른 영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바둑판 위에서 룰렛의 전략이나 규칙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유행이라는 게임에서 벗어난 사람은 유행의 흐름이 어떻든 간에 그것에 좌우되지 않는다. 특정한 사회적 담론에서 벗어난 사람은 그 안에서 규정되는 진영 논리에 좌우되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이 어떤 게임 위에 서있는지, 그것이 정말 본인의 의지가 맞는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살면서 오만가지 형태의 게임을 마주하게 된다. 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혹은 상대방의 의지에 따라, 상황의 흐름에 따라 당신은 게임에 참여하기도 하고, 그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게임에 참여하여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고,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할 수도 있다. 경쟁적인 게임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게임도 있다. 비교적 쉬운 게임도 있고, 어려운 것도 있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서 훌륭한 게이머는, 무엇보다도 '올바른 전략'을 세우는 자다. 올바른 전략은 올바른 목표 설정에서 기인한다. 앞서 말했듯이, 동일한 범주의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목표나 전략은 저마다 다르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을 버는 것이 큰 틀에서의 '게임'이지만, 그러한 재산 축적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진 사람들마다 다를 것이다. 만약 이 게임에서 '돈을 버는 것'자체가 목표인 사람들은, 일단 다른 것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전략을 세울 것이다. '나만의 거주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한 거주 공간의 수준에 맞게 게임에 참여할 것이다. 올바른 전략인생이라는 거대한 게임 공간 안에서, 궁극적인 결론으로 수렴하는 실천적인 전략을 뜻한다.


  어떤 게임은 참여가 불가피해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뭐는 해야 하고, 무엇은 꼭 있어야 하고, 그런 식으로 말한다. 참여하고 싶진 않지만 참여해야 하는 게임, 옳지 않거나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참여해야 하는 게임이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생각은 허상이다. 혹은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물론 필연적인 게임도 존재한다.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인간관계, 주거 공간 확립, 먹고 입는 문제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그 같은 게임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집에서 살지', '어떤 인간관계를 형성할지' 같은 게임은 그것을 넘어선 문제 설정이다. 그것은 대개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당신이 참여하고자 한다면 언제까지고 참여할 수 있고, 벗어나고자 하면 어디까지고 멀어질 수 있는, 그런 게임인 것이다.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사실 적절한 전략을 세우는 건 보통 어렵지 않다.

  문제 상황을 구조화하는데 익숙해지면, 많은 범주의 문제들이 디테일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동일한 전략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최고의 전략, 최선의 전략을 찾아내는 건 항상 어려운 일이지만, 표준값에 해당하는 무난한 전략을 선택하는 건 대체로 쉬운 일이다. 사실, 진짜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그 전략을 얼마나 일관성 있게 수행할 수 있냐는 것이다. 결국 궁극적으로, 전략은 실천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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