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각 Mar 06. 2021

인정받지 못하는 용기

#14. 용기, 책임.


  용감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언제나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혼자 지레 겁먹지 않고 문제 상황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랐다. 남들이 뭐라 하든 간에, 스스로 옳다고 믿는 소신이 있다면 끝까지 관철하고, 그 과정에서 실수한 부분이나 스스로 틀렸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발견되면 여지없이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랐다. 내면에 용기가 충만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모든 순간에 그렇지는 않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많은 순간에, 나는 겁쟁이로 존재할 것이다.


  책임감을 가지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무슨 일을 맡았으면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완수하라고, 도중에 포기하거나 내팽개치지 말라고,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내가 특별히 책임감이 없는 인간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런 종류의 미덕이 강조되는 상황에 많이 직면해왔던 것 같다. 구조적인 문제가 발생한 게 아니라면, 혹은 개인이 어찌할 도리가 없는 불가피한 변수가 개입한 게 아니라면, 어떤 상황에서 누군가는 무언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야 문제를 개선할 수 있고, 조직이 응집력 있게 분화될 수 있으며, 사회가 효율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개인 또한 그러한 구조 속에서 책임감을 가짐으로써, 소속감과 안정,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책임을 지는 방식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가령 어떤 업무를 구성하는 프로세스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프로세스 관리 담당자를 A라고 해보자. 누군가는 A를 업무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A가 자신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이행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럴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없는 사람일 것이라며 말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로 인해 발생한 문제는 자기가 완수해야 하며, 설령 어려움이나 불쾌한 일을 겪더라도 A가 직접,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혹은 문제에 대해선 최대한 신속히 해결하되, 상황이 해소된 뒤에 따로 페널티를 부과받는 방식으로 그의 잘못을 처벌해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신기하다면 신기한 점은, 이들 각각의 태도가 똑같은 '책임'에 관한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배타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 상황에서 떠나는 것, 문제 해결을 떠맡는 것, 문제 상황과는 별개의 페널티를 부과받는 것, 이 세 가지 견해의 요구는 모두 '문제를 발생시킨 사람에 대한 책임'을 주장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예컨대, 문제 상황에서 떠나는 건 다른 견해를 가진 이가 보기엔 무책임하게 도피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끝까지 문제 해결을 도맡아서 하려는 건 능력도 없으면서 고집만 피우느라 상황을 악화시키는 무뢰한의 태도로 보일 수 있다. 페널티 부과는 실수에 대한 경각심을 길러준다는 효과는 있지만, 어쨌든 문제 상황 자체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것은 책임 그 자체에 대한 문제라기보단, 시스템의 유지에 관한 사후 처리의 문제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책임감'은 어떤 방식의 가치관을 수반해야 하는 걸까. 보다 직관적인 논의를 위해 예시를 구체화해보겠다. A는 회사에서 3개월 단위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A는 3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 팀원들에게 진행 상황을 보고해야 한다. 하지만 매주 경과보고가 진행될수록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진다. 한 달쯤 지났을까, 모든 팀원이 A가 프로젝트를 맡을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여러 사람이 그에게 조언하고, 소소한 도움을 주려고 해 봤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A도 내심 자기가 문제인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팀원들은 각자 맡은 업무가 있으며, A가 프로젝트를 포기한다면 문자 그대로 일을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다. 누구도 일을 '떠맡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A가 자신의 '책임감'을 발휘하려고 할 때, 그는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까?


  이것은 '책임'에 대한 어떤 추상적인 측면이나 정의를 논하고자 하는 질문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A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감을 발휘하는 적절한 처사인지 묻는 것이다. A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다. 자기가 계속하거나, 포기하고 다른 팀원들에게 넘기거나. 하지만 적어도 위 예시에선, 그가 프로젝트 진행 과정 속에서라도 특정한 역량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다. A는 피드백을 받으면서도 나아지지 않는다. 그는 그 일을 '처리할 수 없다.' 어떤 업무를 처리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그것을 할당한다면, 이는 관리자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팀원 개개인의 역량을 파악하고 있는 것도 관리자의 주요한 요소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모든 이의 능력을 항상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회를 주는 차원에서 업무를 배정하는 경우도 있으니, 여기선 그런 부차적인 요소는 배제한다.


  이는 상당 부분, 어떤 종류의 용기를 가질 수 있느냐의 문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책임지는 방식에도 종류가 있듯이, 용기에도 종류가 있다. 우리는 겁쟁이가 되지 않기 위해, 타인의 비난이나 스스로의 자책을 면하기 위해 용기를 발휘하고자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 있는 사람으로 비춰지고자 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스스로 겁쟁이가 되어야만 문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면, 모든 비난과 조롱을 감수해야만 하는 용기를 발휘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종류의 용기를 감당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용기를 내적인 능력의 소산이라기보단, 남들에게 그러한 능력의 소유자로 인정받아야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바닥까지 치닫는 오명을 감수할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문제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문제에 대한 희생을 요구받을 때 훨씬 강한 결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는 인간 정신의 나약함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사람은 타인이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자신의 희생, 용기, 결단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사극 드라마를 보다 보면 왕이나 장수 등 역사적 캐릭터들이 역사가 어쩌고, 후세가 어쩌고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본인이나 본인의 가족이 죽고 사는 기로에 서있는 극적인 상황에서, 그런 말이나 내뱉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을 보면서 참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 시청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존재의 가장 본질적은 욕구를 생각해보면, 역사 속 인물들의 그러한 태도는 꽤 납득할만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타인에게, 이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싶어 한다. 관계, 노동, 육아, 교육, 자기계발 등 모든 분야에서 마찬가지다. 용기나 책임감에 관한 문제도 거시적으로 보면 그러한 차원의 문제에 해당한다.





  우리는 대가를 전제하는 사고방식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다. 이는 일견 당연해 보인다. 어떤 행동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영향이 산출되어야 하는 것처럼, 투자가 있으면 리턴이 있어야 한다. 심지어 그러한 손익 계산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봉사활동조차도, 이 세상이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 혹은 자신의 도덕적 욕구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없다면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무언가가 옳다는 그 믿음 하나로, 결과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나 자신의 행동에 대한 도취감이 전제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궁극적인 용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종류의 보상심리에서 벗어난 이타적 행위, 이는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이자 책임감이다.


  그러니 나는 당신에게 그러한 용기를 가지라고 독려할 수 없다. 권할 수도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불특정 다수에게 당신도 최대한 노력하면 세계적인 학자가 될 수 있고, 세계적인 운동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독려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지칭되는 '노력'의 단위는 범인의 수준에서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는 30분씩, 하루에 3시간 공부한 걸 죽을 만큼 노력했다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10시간씩, 6시간 내외로 자면서 공부한 걸 남들만큼은 했다고 말하면서 멋쩍게 웃는다. 사람은 누구나 가능성으로서, 존엄하고 용감한, 숭고하고 책임감 있는 존재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모든 순간에 그럴 순 없을뿐더러,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서조차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많은 사람이 그렇게 될 필요도 없다며, 그러한 종류의 지향을 세운 자들의 인격적 노력을 비웃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나는 이 시점에서 다시금 되짚을 수밖에 없다.

  당신은 현명하고 책임감 있는 주체로 성장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용감한가? 그러한 노력을, 그것에 대한 무시와 멸시에도 불구하고 지속해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삶에 책임감 있는 사람인가? 당신은 노력의 단위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마 섣불리 대답하기 힘든 질문일 것이다.

  지금은 그것으로 됐다.

매거진의 이전글 게임적 사고: 목표 수립, 행동 전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