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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Mar 24. 2021

성장하는 삶, 마음의 경계

#15. 아이, 어른.

  

  사회는 다양한 종류의 경계가 설정되어 있는 공동체다.

  일정 연령이 되면 술이나 담배가 허용되는 시스템은 삐딱한 시선에서 보자면 의문스러운 측면이 있다. 시간은 빈틈없이 연속적이고, 우리의 삶이나 육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법적으로 얼마 전까진 '금지'였던 것이, 얼마 뒤에 '허용'되는 구조는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물론 우리는 어딘가에는 선을 그어야 한다. 20살이 술을 마셔도 된다고 해서 8살까지 그래도 돼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어른이 경험해봤듯이, 19살과 20살은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인간은 언제부터 어른이 되는 걸까.

  아마 가장 보편적인 기준은 나이일 것이다. 사실 그 자체는 크게 이상하지 않다. 20살보다 25살이, 25살보다 30살이 '일반적으로' 성숙할 가능성이 높다. 인간 사회에 100% 통용될 수 있는 진리가 없다면, 어쨌든 우리는 더 높은 가능성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정신적 성숙도는 보통 경험으로 표상되는 시간의 축적에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40살이 되어도, 50살이 되어도 미성숙하고 유치하게 굴거나, 스스로 어른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이들도 분명 있다. 만약 자기 자신이 스스로 '아이'의 범주에서 탈피해 '어른'의 시야를 갖추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선 두 가지 측면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일정한 과정을 거쳐 어른이라는 단계까지 도달하는 이미지다. 이를테면 걸음마부터 떼기 시작한 사람이 꾸준한 유산소 운동을 통해 10km를 쉬지 않고 달릴 정도의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그는 '10km 이상 달릴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인간의 능력이나 정서적 태도, 행동 양상에 있어 언제나 더 높은 단계가 있고, 우리가 그것을 점진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면, 아마 '어른'은 그러한 향상심을 통해 특정한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일종의 '지위'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느 순간 불현듯 이해하게 되는 깨달음의 이미지다. 우리는 어쩌면 어른이라는 경계를 명확히 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사람은 빈틈없는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살고 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크게 다르지 않고, 내일의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상 속에서 1초 전의 '나'와 10초 뒤에 '나'는 사실상 똑같고, 20초 전의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1년 전의 '나'와 1년 뒤의 '나'는 꽤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둘은 '언제부터' 달라졌을까? 그 차이를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까? 아이와 어른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단지 저마다의 계기로 어느 순간 어른이 됐음을 실감할 수 있을 뿐, 그것은 신체적 능력처럼 의식적인 노력이 유의미한 효과를 산출해내는 영역은 아니다. 이 경우, 아마 '어른'은 찰나의 깨달음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우연적 경지'일 것이다.


  어른이 '지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향상심, 노력의 긍정적 가능성에 열려있는 부류일 것이다. 인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적, 신체적 능력이 객관적인 숫자로 명확히 환원될 수는 없어도, 그들 각각의 능력은 여전히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 부류 말이다. 실제로 우리는 측정할 수 없는 능력의 향상을 경험할 때가 분명히 있다. 이를테면 어떤 글을 '읽는 능력'이 그렇다. 사람은 타인의 독해력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적어도 스스로 어떤 글을 읽고 이해하는 속도나 범위가 더 향상된 것 같다는 '느낌'은 누구나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갓난아기 때부터 독해력이 뛰어난 사람은 없다. 글에 대한 감수성은 경험과 노력으로 환원될 수 있고, 그 결과는 일종의 성취로써 내내 지속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이 같은 생각에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 예컨대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객관적인 수치나 수단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건 기만적인 연극의 가능성을 시사하기 마련이다. 어른이 내적인 능력의 성취, 즉 점진적 향상을 통한 도달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 결론지어질 수 있는가? 단지 주관적으로, 스스로 그렇게 느끼면 그는 충분한 성취를 이뤄낸 걸까? 혹은 그러한 성취가 전제되는 특정한 행동 양식을 보이면 그를 어른이라고 추정해야 하는 걸까? 전자는 어쩐지 못 미더운 방향성이다. 스스로 어른이라 거들먹거리는 미성숙한 사람은 지천에 널려 있다. 후자는 왠지 꺼림칙하다. 이 경우 여전히 '모방'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예컨대, 어른스러운 행동 양식을 모사하는 어린아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외양적 미성숙함에도 불구하고 어른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마 이러한 의문은 단지 외적인 모습에 대한 편견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종류의 질문일 것이다.


  어른이 일종의 '우연적 경지'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에 대해 참선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쉬울 것이다. 종교적 수행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불현듯 깨달음을 얻고 특정한 경지에 이른다. 물론 일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삶의 궤적을 뒤흔드는 깨달음이 단지 수행자에게만 허락되는 전유물은 아니다.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의 경우에도 우연찮은 계기로 전과는 상당히 다른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었다던가, 어떠한 경험을 통해 소박한 진리에 비견되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상황을 마주하기도 한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특정한 경구나 명언, 글귀에 마음이 끌리는 경우다. 그러한 경험이 실제로 변화와 이어지든 그렇지 않든 간에, 어떤 메시지를 접하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기억은 아마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어른이라는 상태는 그러한 종류의 우연적인 작용으로 인한 무작위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특수한 계기로 전보다 눈에 띄게 성숙해지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우연한 깨달음은 적어도 어른이 되는 하나의 수단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는 어른이 되는 '유일한' 수단일까? 그렇게 생각하려니 막연한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 '어른'이 정서적 성숙함과 이성적인 태도의 발현이 결합된 합리적인 존재라면, 그러한 존재론적 상태가 우연찮은 단수의 계기로 도출된다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또한 실제로 긍정적인 의미로, 어른스러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한 노력의 과정을 통해 남들보다 성숙하고 훌륭한 성품을 지니게 되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설령 이들 또한 그 같은 과정에서 찰나의 깨달음을 통해 어른이 됐다고 해도, 그 깨달음에 선행하는 모든 노력들이 무의미하진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어른이 되는 걸까. 아이와 어른, 그 마음의 경계는 어디쯤에서 그어지는 걸까?


  



  만약 아이와 어른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아마 그 차이는 마음에 관한 것이리라. 왜냐하면 신체적으로 우리는 극적인 변화의 경계를 설정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점진적인 과정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약물이나 수술 같은 외과 시술을 통해 그러한 변화를 이끌어낼 순 있겠지만, 어쨌든 어른이 되기 위해 그런 과정을 거치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음에 관해, 특히 마음가짐에 관해서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예컨대 행복에 대해 생각해보라. '행복'은 '성취'가 아니다. 마치 게임 속 퀘스트처럼, 어떤 행위나 결과를 이뤄낸다고 해서 명백한 부산물로 뒤따라오는 물질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행복'은 '과정'이다. 우리는 오로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에만 행복하다고 여길 수 있을 뿐, 그것을 담보하거나, 맡겨두거나, 교환할 수 없다. 행복은 마라톤의 결승 지점에 그어져 있는 결승선이 아니다. 그것은 마라톤의 트랙이자 그 위를 달리는 향유의 과정, 그 자체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은 상태이다.


  어쩌면 어른이라는 개념도 이 같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른은 노력이나 우연적 계기를 통해 획득하는 지위 같은 게 아니라, 단지 그렇게 되고자 하는 상태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른스러워지고자 하는 노력, 정서적으로 성숙해지고, 이성적인 태도를 갖추고자 하며, 합리적인 존재가 되고자 노력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즉, 우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어른이 '될 수 없다.' 어른은 북극성과 같은 개념이다. 여행자는 북극성에 절대로 도달할 수 없지만, 그것을 보고 여정의 방향성을 결정한다. 이 경우에 사람이 북극성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사실이 북극성의 존재 가치를 폄하시키지 않는다. 어른이라는 지위를 상정한 의식적 노력, 그러한 이름의 우연적 성취를 지향하는 삶의 태도는 아마 그들이 바라는 직접적인 결과를 산출해내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러한 목표의 좌절이 노력의 가치를 폄하할 순 없다.



 


  사회적으로 그어진 경계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사람과 동물, 혹은 자연적 존재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러한 경계에 존재한다.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경계는 자연적인 사실을 초월한 개념이다. 국경선, 시간, 날짜, 지위, 화폐 가치 등 인류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그 경계들은 자연 세계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물리적인 세계가 아닌, 인류라는 종만이 공유하는 추상적 세계에 속하는 것들이다.


  어른에 관한 개념도 어쩌면 이 같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른이라는 자연적인 상태는 없지만, 그러한 상태를 지시하는 특정한 경계를 긋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성인식이나 사회적 금기의 허용(술, 담배 등)을 지시하는 작위적인 경계가 그러한 맥락에서 통용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의례적으로 어떤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 이해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논한 내용들은 보다 개인적인 의미로 통용될 수 있는 지향점을 시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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