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관성, 정지.
가끔 길을 걷다가 갑자기 멈춰서, 그냥 가만히 그 자리에 서있을 때가 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럴 때가 있다는 것이다. 부단히 옮기던 발걸음을 갑자기 멈춰서면 기분이 묘해진다. 처음엔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나를 따라 움직이던 풍경도 같이 멈추고, 방향성을 상실한 몸이 당황하는 것만 같다. 그러다 잠깐 멍해지고, 이후 점차 편안해진다. 주위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새로운 생각 같은 것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마음에도 관성이 있다.
움직이는 물체는 그 상태를 지속하려는 관성을 가진다. 마음이나 가치관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 특정한 생각이나 습관을 가질 때, 그것은 지속되고자 하는 관성을 수반한다. 그러한 작용은 대개 무의식적이라서, 명확한 의지를 가지고 성찰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그 같은 상태가 지속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사람마다 어떤 음식, 어떤 유형의 사람, 어떤 헤어 스타일이나 패션을 보고 기분이 나쁘다거나, 이상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대상이 괴상해서가 아니라, 대개 당신이 그와 관련된 관성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무의식적인 편견의 지속이다.
모든 관성이 '의도치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저마다 '좋은 습관'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의 일상 세계에 부합하는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한다. 그런 것들은 구체적으론 저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나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의도적으로 관성 상태를 유지하기도 한다. 사람이 어느 시점에서 자신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관성을 기이하다고 느낄 때,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바꿔야겠다고 결심할 때는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의도적인 시작'에서 긴 시간이 흐른 뒤, 그러한 관성적인 태도를 갖추고자 했던 이유를 망각하거나 그로부터 멀어진 경우다. 다른 하나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나 사고가 누적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관성이 시작되고 유지되는 경우다.
종종 어떤 계획을 밀고 나가야 하는 상황에 처할 때, 끝이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는 길을 나서야 할 때 하는 말이 있다. 다음 스텝만 생각하라. 한 발을 내딛으면 다음 발을 내딛고, 그다음엔 또 다른 발을 내딛고, 그 과정의 반복만 생각하라는 것이다. 거창한 목표나 원대한 계획의 내부적 효율성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단지 앞으로 나아가라는 의미다. 사람들의 완벽주의는 특히 무언가를 시작할 때 발휘되기 마련이다. 극도로 효율적인 프로세스와 명확하고 거대한 목적지를 설정하고, 모든 절차마다 필요한 준비물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기타 다른 일들이 말끔히 처리되고 난 뒤의 시작을 사람들은 바란다. 의지력이 강하고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에게는 적절한 바람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시작의 완벽주의'는 첫 발도 내딛지 못하고 실패로 끝난다. 혹은 시작점 근처를 맴돌다가 갖은 핑계를 내세우며 이내 포기를 종용한다.
다음 스텝만 생각하는 태도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이다. 이 전략의 장점은 긍정적인 목적의식에 대한 막연한 인상만을 가지고도 어떻게든 성취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지금 당장, 바로 시작하는 것이 '시작의 완벽주의'에서 비롯되는 우유부단함보다 나은 결과를 산출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마음에 관성력을 조성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습관은 특정한 행위나 신체적 버릇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습관은 무의식적인 사고의 틀, 즉 태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을 보며 교양 있어 보인다거나, 잘 사는 티가 난다거나, 좋은 아우라가 느껴진다고 여긴다. 그들은 그렇게 태어난 게 아니라, 그렇게 보일 수 있도록 특정한 관성을 유지해온 것이다.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억지로라도 타인의 긍정적인 면들을 최소 세 개씩 꼽아보는 습관을 들여보라. 부지런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사소하지만 매일 반복할 수 있는 유익한 루틴(이부자리 정리나 가벼운 운동 등)을 형성해보라. 자신감 있어 보이고 싶다면 거울을 보면서 다양한 표정을 훈련해보라.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중요한 건 다들 알다시피 실천인데, 문제는 이와 관련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마치 '실천을 도와줄 마법 같은 방법'이 있는 것처럼 여기며 온갖 자기 계발서나 유튜브 영상을 뒤적거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타인이 도와줄 수 있는 건 과정뿐이다. 실천은 결론이나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관성을 위한 시작점일 뿐이다. 실패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실패는 시작점에조차 스스로 서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다소 허무맹랑해 보이는 격언은 이런 맥락에서 타당하다. 시작은 습관을 형성하고, 그 관성이 자동적으로 그를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습관을, 관성을 유지하는 게 좋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좋은 습관' 만큼이나 '나쁜 습관'을 신경 쓴다. 남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사소한 말투나 몸짓, 웃음소리나 웃는 표정, 기타 생활할 때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부적합한 요소들을 우리는 근절하고 싶어 한다.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 또한 문제점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어떤 식으로 처리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도 보통 안다. 사람들이 모르는 건 대개 '문제점을 발견하는 방법'이다. 습관이나 관성은 무언가를 지속할 뿐, 그것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키진 않는다. 즉, 그것은 실천의 지속에 있어서 큰 역할을 수행하지만, 실천의 가치를 재고하거나 조정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관성은 문제를 발견할 수 없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뭐라도 지속하는 게 낫다. 단지 생각 없이 지속하는 것보다 반성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더 나을 뿐이다.
이는 '시작의 완벽주의'가 더 나은 태도라는 말이 아니다. 반성적 실천은 관성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시작의 완벽주의'는 대개 관성을 가지게 하는 절차 자체를 방해한다. 올바른 내면을 형성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관성이 지속되는 과정 속에서 반성적으로 전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앞서 언급했던 관성의 두 문제점을 궁극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에게 필요한 건 잠시 멈춰서는 것, 관성을 종결하지 않고 스스로를 재정비하여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정지의 순간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정지'는 시간을 낭비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행위가 아니다. 단순히 잠깐의 여유를 지속하고자 하는 엄살 같은 것도 아니다. 이는 삶의 방향을 재조정하고, 새로운 가치와 생각, 행위를 불러일으키고, 생활의 질을 윤택하게 하는 생산적인 행위이다. 다만 여기서의 핵심은 '정지의 관성화'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여타 행위나 생각, 태도와 마찬가지로 정지의 상태 역시 관성을 가질 수 있다. 정지의 상태에 관성력이 개입할 때, 사람은 무력감이나 우울감, 정신적 피로를 느끼게 된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느낌, 뭘 해도 안 될 것 같은 비합리적인 예감 따위의 것들이 이러한 정지된 상태를 지속하고자 하는 관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에 정지는 무엇보다도 지점과 지점 사이, 반성과 재개를 연결하는 실천적인 행위로 수행되어야 한다. 습관은 당연한 게 아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정지의 관성'에 매몰되어 있지 않는 한, 모든 실천의 지속은 정지로 말미암아 반성적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더 나은 삶으로 이끄는, 더 좋은 가치를 향해 뻗어나가도록 도와주는 '긍정적인 관성'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지'가 단순히 '관성'에 포섭되는 개념은 아니다.
정지는 그저 진행의 중간에 존재하는 일시적인 일탈 같은 게 아니다. 사실 정지는 대단히 고유한 의미를 가지는 행위이다. 그것이 남용되고, 그 자체가 지속적 추구의 대상이 되는 경우에 정지는 부정적이고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멈춰 선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통제권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내가 나의 삶을 내가 추구하는 바에 따라 꾸려나가고 있다는, 그런 실감 말이다. 사람이 능동적인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선 그러한 실감이 필요하다. 자신을 가눌 수 없는 사람은 자율적으로 멈춰설 능력이 없다.
일상 속에서 흔히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설명하는 경우를 접할 수 있다.
나도 종종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는 '나는 이런 사람인데, 여기서 바뀔 생각이 없으니 당신이 이해해달라'는 암묵적인 요구가 담겨 있다. 이러한 요구가 항상 부당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그런 식으로 소개하면서, 정말로 자신이 바뀔 수 없기 때문에 이해를 구하는 거라고 스스로 여긴다면, 그건 단지 오만하고 불성실한 관념일 뿐이다. 변화는 귀찮은 것일 뿐, 불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