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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Apr 23. 2021

품위 있는 삶

#17. 품위(Dignity)



  많은 책에서, 영상에서, 혹은 사람들의 입이 '품위 있는 삶'을 말한다. 품위라는 말 자체가 왠지 고상하고 귀족적인 느낌이 들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품위에 대한 보편적 갈망은 계급적 의식에서 비롯된 상승 욕구에 가까운 것이리라. 이런 맥락에서 '품위 있는 삶'이란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그에 따른 더 많은 시간적 여유를 누리면서, 알아듣기도 힘든 전문 용어를 남발하거나 절제된 몸가짐을 내세울 줄 아는 생활상을 뜻한다. 이는 한 마디로 특정 계층이 공유하는 의례적 양식을 답습하는 것이다. 이 경우, 품위는 먼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고루한 생활 패턴을 모방하면서 나타나는 처세나 수사의 영역에 속한다.


  다소 냉소적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설령 품위가 이러한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 단지 비루하거나, 그저 낡아빠진 방식을 추구하고 있는 건 아니다. 오랫동안 살아남은 행동 양식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계급적 의식에 근거한 품위는 기본적으로 차이를 형성하는 데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인간 본연의 본능, 속성 같은 것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단지 원초적이고 게걸스러울 뿐인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의 문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자신(自信)에 기반하여, 품위는 자연 상태의 인간, 혹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한 상황의 인간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려고 한다. 이는 여전히 선민적이고 오만한 발상으로 보일지 모르나, 내용의 본질 자체는 고도화된 문명사회가 지향하는 바와 어느 정도 결을 같이 하고 있다.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개인에게 자신의 '동물성'을 극복하길 요구한다.


  품위를 지키는 것의 목적이 타인의 인정이라면, 이 같은 협소한 정의와 의미에 대한 이해만으로도 충분히 '품위 있는 삶'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품위라는 말의 외연을 더 확장시킬 수도 있다. 예컨대 품위의 근본적인 방향이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가지고 있는 동물성의 극복(여기서 말하는 극복은 '거세'가 아니라 '자율적 실천'이다)이라면, '품위 있는 삶'이 꼭 외적인 처세나 수사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물론 당신이 그러한 극복의 업적을 타인에게 굳이 자랑하고 싶다면 여전히 그에 걸맞은 처세나 수사가 필요하겠지만, 내적인 성취의 목적이 자기만족이라면 오히려 다른 종류의 노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여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고, 혼자 있을 때 속앓이 하는 삶이 충분한 내적 성취를 이뤘다고 보긴 힘들기 때문이다. 

 



  내적인 성취가 수반되는 품위란 무엇인가? 또 그러한 품위가 상존하는 삶이란 어떤 삶을 의미하는가? 이에 가장 일반적이면서 설득력 있는 대답 중 하나는 '존엄성을 지키는 삶'이다. 즉, 여기서 품위를 지키는 노력은 존엄성을 지키는 노력과 동일시된다. 이제 문제는 존엄성의 의미다. 존엄성이란 무엇이고 왜 그것을 지켜야 하는가? 사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마치 세뇌당하는 것처럼,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고 선전하는 교육 체제 하에서 살아왔다. 그렇기에 여기서 대답되어야 할 또 다른 질문 역시 존재한다. 왜 인간은 존엄한가?


  인간이 왜 존엄한 존재인지, 존엄성은 무엇인지, 우리가 왜 그것을 지키는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연결되어 있는 결론이 선명하게 드러날 때, 사람이 '품위 있는 삶'을 지향해야 하는 이유와 그에 따른 방법론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이 논의가 최종적으로 도출해낼 종착점은 실천의 영역이다.




  먼저 존엄성이 무엇인지 밝히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이에 대한 가장 냉소적인 답변은, 인간이 스스로 존엄하다고 규정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존엄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체적으로 귀하고 특별하다는 근거가 단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자기들끼리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자기규정에 아무런 근거나 설득력이 없다고 해도, 자기규정의 효용이나 기능까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순 없다. 요컨대, 어떤 믿음이나 사실이 거짓이나 가짜, 허상이라고 해도 거기서 도출될 수 있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설령 인간이 물리적으로,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존엄성의 지위가 허상이고, 그것이 인간이라는 종이 내세우는 오만한 독단이라고 해도, 사람들 사이에서의 그러한 '약속'은 '유용성'을 지닌다. 과거에 숱하게 발생했던 전쟁이나 살인, 무신경한 범죄 행위가 오늘날 인간이 존엄하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축소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면, 더욱이 그 유용함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존엄성이 단지 그런 개념이라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같은 정의 하에서 존엄성은 단지 내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부여받는 천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내가 생물학적인 인간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한,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정의에 반감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 경우, 존엄성은 어떤 범죄를 저지르든 간에 보장받을 수 있는 불가침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즉, 연쇄살인 범죄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하다. 최악의 전쟁 범죄자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하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건 감정적 편향을 건드리는 선동적 수사의 방식에 속한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서 이러한 표현을 덧붙인 건, 존엄성의 의미를 보다 실천적으로 고찰하기 위해 '천부 존엄의 개념'에 대한 비판을 직관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방향의 논의 방식을 기대해볼 수 있다. 만약 계속해서 논의되고 있는 존엄성, 품위 같은 것들이 어쨌든 인간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인간적인 속성의 표현이라면, 존엄성이 무엇인지는 '왜 인간이 존엄한 지'를 밝히는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말이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의 어떤 속성에서 존엄함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까? 어떤 측면에서, 사람은 다른 생물 종과 다른 고유한 개체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걸까? 이에 대한 가장 전통적이면서 보편적인 대답은 '이성'일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여타 짐승들과 다르고, 또 존엄하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언급하는 '이성'은 근대적 의미의 제한적인 범주를 가진 용어가 아니다. 무의식과 감정, 여타 현대에 이르러 인간의 주요한 지적 속성이나 전제로 평가받는 다양한 차원의 기능 위에 올려져 있는 의식적 숙고 능력을 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전처럼 완전한 자유 속에 있지도 않고, 이성의 한계를 신적인 영역까지 몰아붙일 수도 없지만 여전히 이성적인 존재이며, 또한 그 능력을 얼마든지 가치 있는 방향으로 발휘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조건이나 본성에 저항할 수 있고, 주어진 상황에서 숙고에 따라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선택의 범주가 설령 제한적이라고 해도 말이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가 이성적인 고찰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라면, 존엄성은 이성과 사실상 동치 되어 나타난다. 그렇기에 존엄성을 지키는 삶이란 인간의 타고난 동물성을 넘어서 이성적인 능력을 최대한 개발하고 발휘하고자 하는 노력이 수반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기분에 매몰되지 않고, 일상의 곳곳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동물적 본성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옳고 그름에 대한 올바른 판단 기제와 인간 존재에 대한 건전한 믿음, 역지사지와 심사숙고의 자세를 두루 갖추는 삶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품위란 무엇보다도 인간다움이다.




  논의를 마무리하는 데 필요한 개념들은 다 언급됐다. 정리하면, 넓은 의미에서 '품위 있는 삶'은 내적인 성취를 지향한다. 여기서 타고난 동물성을 극복한다는 전제 하에서 요청되는 내적인 성취는 '존엄성 추구'다. 존엄성은 인간 이성의 발현이자 그것의 실천을 근거로 하여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존재론적 지위이다. 즉, 존엄성을 추구한다는 건 인간의 이성적 능력의 개발과 실천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과 전제에 기반하여 인간은 존엄한 것이고, 또 그렇기에 그러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당위가 도출된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존엄함은 충족되어야 할 조건을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자 한다면, 또 그러한 삶을 살고 싶다면 그에 필요한 최소 요건을 달성해야 한다. 당신은 노력해야 존엄해질 수 있다. 그리고 노력해야,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여기에 타인의 인정은 필요하지 않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 그러한 삶을 추구하고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살게 된다면,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품위나 존엄성이 무엇인지 체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실천에 관한 단서를 언급해야겠다. 상술한 결론은 '품위 있는 삶'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달성되기 위한 조건을 밝히는 부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그 조건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충족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단서는 사실 '이성'이 무엇이고 그것이 존엄성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밝히는 과정에서 이미 드러났다. 이를 좀 더 구체화하자면, 이성적인 능력이 실천적으로 발휘되는 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사람은 점심에 뭐 먹을지, 저녁에 뭐 먹을지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이성적 고찰'이라고 보긴 어렵다. 단적으로 '이성=사고하는 능력'은 아니다. 이성은 보다 넓은 조건, 법칙, 세계관 속에서 그것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특정한 사고, 행동 양식의 전제를 의미한다. 일차원적으로 점심 메뉴를 고려하는 건 이성적 고찰이 아니지만, 육식에 관한 공리주의적 고찰이나 플라스틱 사용에 대한 지구적 차원의 이슈를 고려하여 메뉴를 선택하는 건 이성적인 고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허기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본성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의 올바름에 대한 지향 속에서 실천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품위 있는 삶이란 이러한 숙고와 실천을 지향하고 체현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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