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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Apr 25. 2021

이야기의 죽음

#18. 요약(Summary)


  어떤 사람이 특정한 영화의 내용을 요약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사실 무슨 영화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쩐지 그걸 듣고 있는 내내 불편했다는 느낌이다. 예컨대 우리는 사랑 이야기를 각색한 창작물을 '로맨스'라고 하고, 우스운 농담과 과장된 연출이 반복되는 창작물을 '코미디'라고 한다. 그때 그 사람도 자기가 본 영화를 그런 식으로 설명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장르의 전형적인 특징을 답습하고 있고, 이 부분은 어디서 착안된 기법이 사용됐고, 서사 구조의 진부함은 또 무엇이며.... 나는 그 영화의 비평을 듣고 있다는 사실에서 불편한 게 아니었다. 추측컨대, 그다지 좋아한 영화도 아니었다. 




 

  이야기를 요악하는 건 여러모로 유용한 측면이 있다. 쓰여진 모든 글이나 뱉어진 모든 말이 전부 동등한 의미와 맥락상에서 적절히 존재한다고 볼 순 없다. 굳이 해도 되지 않을 발언, 꼭 넣었어야 했나 싶은 문장 같은 것들이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전체 주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 불필요한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즉, 요약은 소통과 이해의 경제성을 보장한다. 300쪽이 넘는 책도 핵심만 집어서 구술하려고 하면, 물론 책의 밀도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대개 30분 내외의 요약된 설명으로 그것에 담긴 핵심적인 메시지들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장점은 특히 시간적 효율성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유용한 가치를 시사한다. 이런 맥락에서,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요약해달라는 부탁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의 태도가 '이해 능력의 부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유용성 덕분인지 요약되고 압축된 내용들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인기를 끈다. 복잡한 과학 이론이나 철학적 담론을 10분 내외로 압축한 영상들, 2시간 내외의 영화 내용을 20분 이내로 결말까지 보여주는 영상들, 자신의 삶을 요약한 자기소개서, 한 쪽 내외로 기술된 성격 및 성향에 관한 보고서 등등.... 사람들은 점점 더 짧고, 한 입에 쏙 넣을 수 있는 제조된 지식을 원한다. 혹은 그런 종류의 유희거리를 원한다. 왜냐하면 인생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현대 사회는 기다란 무언가에 열중할 노고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는다.


  사실 요약의 유용성은 소통과 이해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기억의 측면에서도 경제적 이점을 보장한다. 러닝타임이 긴 영화를 보는데 몇 분 몇 초에 무슨 장면이 나오고, 인물들이 담배 피울 때 대사는 어떻게 처리하고, 옷차림이나 날씨, 배경의 건물이나 도로가의 연출은 어떻고 하는 것들을 전부 외울 순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영화를 많이 보거나, 자주 즐기는 사람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이는 독서나 대화, 기타 영상을 볼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는 어쨌든 그러고 싶어도, 그 전부를 기억해낼 순 없다. 그래서 그나마 중요한 사실들을 간직하고자 핵심을 요약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우리는 그러한 요약을 통해서, 해당 대상을 '더 잘 이해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줄여서 설명하기 전엔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막막했는데, 몇 문장으로 압축하고 보니까 논해야 할 부분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비평이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 비평은 자신이 논하고자 하는 부분을 선별적으로 '요약'해서, 그것이 마치 대상의 '전체'에 대한 평가로 확장되는 게 정당한 것처럼 꾸미는 일이다. 

 



  다소 냉소적인 문장들이 곳곳에 끼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요약'의 장점에 대한 변론은 충분한 듯하다. 사실 내가 조명하고 싶은 건 요약이 가져오는 폐해다. 이야기의 관점에서 보면, 요약은 묘비명과 같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이나 만화 같은 특정한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는 서사 구조를 요약해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누군가의 생애를 이해하기 위해 묘비명을 읽고 있는 것과 같다.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우주를 여행하는 순수한 아이가 비행기 조종사를 만나는 이야기'라고 요약한다면, 이는 다소간의 사실을 담고 있는 문구라고 볼 수 있다. 혹은 다른 측면에서,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본 어른의 세계를 비판하는 교훈적 동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핵심은 『어린 왕자』를 요약하기 위한 문장이 너무나 많이 존재할 수 있을뿐더러, 그 무엇도 도서의 가치를 올바르게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시는 해당 도서를 감명 깊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야기의 요약본을 보고 그것을 이해했다고 만족하는 경우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서사 구조의 진행을 경험하지 못한 채, 이야기가 끝난 뒤 주요 업적만 정리하여 새겨둔 묘비명을 보며 만족하는 경우와 같다. 물론 어떤 묘비명은 너무나 적절하고 적합하게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서, 정말로 그 서사 구조를 생생하게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의 감상과 일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컨대, 우리네 삶을 하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해보자. 어떤 삶에서 어느 날, 어느 오후에 길 모퉁이를 돌다가 우연히 스쳐 지나간 마트 주차장의 주홍색 펜스를 본 경험이 있을 수 있다. 그 경험은 워낙 찰나의 순간이라, 본인조차도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이 삶에 얼마나 많고, 또 그 순간들이 삶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작년에 뭘 했냐고 물어보면 그는 특징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1년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시간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그 시간 안에서, 사실 특징적인 사건 몇 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오히려 긴 생애에 비추어 볼 때, 그런 종류의 요약은 아무것도 시사하는 바가 없을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현재의 일을, 혹은 가까운 과거나 미래의 일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의 주장이 세부 요소들에 대한 과장된 견해에 불과하며, 우리가 디테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정말로 그것들이 별 쓸모없는 순간들이었고, 실제로 삶이나 이야기의 전개를 결정하는 건 주요 사건들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나는 이에 세 가지 예시를 덧붙이는 걸로 답변을 대신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보통 한국 드라마가 너무 뻔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마지막엔 사랑 이야기로 귀결되거나, 에피소드의 기승전결이 항상 같은 구조로 이뤄진다거나, 특정한 감정을 연출할 때 정형화된 패턴을 답습한다거나(주요 인물들끼리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드라마를 꼼꼼히 보는 사람이라면, 캐릭터의 성격이나 대사 처리, 표정이나 화면 연출, 카메라 워킹이나 배경 음악 같은 것들이 얼마나 다르게 조합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장르'의 창작물이 '비슷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처음부터 과거에 접했던 묘비명을 떠올리며 이것도 같은 죽음을 맞이하겠구나, 하고 지레짐작하기 때문이다. 로맨스는 로맨스가 아니고, 느와르는 느와르가 아니다. 그들 모두는 고유한 이름을 가진 창작물이다. 오로지 우리가 그것들을 요약하려고 할 때, 그들은 뻔한 장르물이 된다.


  이에 대해 좀 더 확장하자면,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타인에게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하는 질문을 받곤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누군가에 대한 요약된 평가를 요구받는 것이다. 이에 당신은 '아, 그 사람은 착하긴 한데 좀 눈치가 없어'라거나, '너무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게 눈에 보여'라는 식으로 대답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이 간과하는 건 우린 정말로 타인의 생각을 알 수 없다는 것과, 생각 및 가치관이 꼭 행동이나 태도와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심지어 타인이 자신과 같은 나이라고 할지라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수 십 년의 시간을 감내해온 존재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본인은 그렇게 복잡하고, 사연이 많고, 입체적인 자아라고 여기는 반면에 타인에 한해선 그럼 그렇지, 딱 이런 사람이네, 하고 손쉽게 결론지어 버린다. 중요한 건, 사람은 누구나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 '아주 극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일상의 모든 측면에서 동일한 성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애당초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도 엄밀한 의미에서 장담할 수 없다. 즉, 사람의 인격은 언제나 적절히 요약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로 생각해보면, 일제강점기엔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있었다. 그들의 활동은 교과서에서, 다른 책이나 영상에서 '항일 투쟁 운동'으로 요약된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무슨 생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됐는지, 가담하는 과정에서의 의심과 시험은 어떻게 이겨냈는지, 산화하기 전날 저녁엔 무슨 기분이었는지, 총을 쏘기 직전에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가락의 감촉은 어땠는지, 감옥에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면서, 그것을 버티거나 굴복하여 실토할 때의 심정이 어땠는지, 모두가 잠든 새벽에 문득 이길 수 없다는 좌절감에 눈물을 흘리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그의 어린 시절은 어땠고, 즐거운 순간들은 언제였고, 하는 것들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단지 그들 모두를 '항일 투사'로 기억할 뿐이며, 그들의 모든 생애와 감정, 기분이나 결의는 분명 한 인간에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방식으로 요약된다. '그들은 불의한 시대에 태어나, 자신의 신념과 조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





   아마 그때 영화를 요약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내가 느꼈던 불편함은, 그가 너무 자신만만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은 자신이 영화에 대해 빠짐없이 이해하고 있으며, 완벽하게 분석해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무엇이 아쉽고, 어떤 부분이 뛰어났고 하는 것들을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으리라. 실제로 꽤 프로페셔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엄밀한 의미에서, 나는 영화의 묘비명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 자유롭고 생생한 서사를 무덤에 묻어두고, 마치 '그것뿐인 것처럼' 요약되고 있는 영화의 이야기가 소비되고 있는 과정을 나는 듣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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