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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Apr 30. 2021

무례한 배려심, 그 필요성

#19. 배려(配慮)


  배려는 문화적이면서, 상대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예의나 규범 역시 그러함에도, 그들과 배려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예의범절을 지키는 건 엄밀한 의미에서, 상대방과는 무관한 태도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 이해한 바에 따라, 혹은 조직이나 상황에 맞게 정해진 규칙을, 즉 예를 표한다면 당신은 적절한 예의범절을 구사한 것이다. 이 경우 상대방이 기존에 당신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거나, 설령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예의는 오로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일련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 나뉘는 행동 양식이기 때문에, 이 경우 그걸 수행하는 사람이나 수용하는 사람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이러한 절차는 그것이 통용되는 문화나 집단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이면서 상대적인 개념인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규범은 예의와 닮았다. 아니, 오히려 넓은 시야에서 보면 규범 안에 예의범절이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예의는 둘 이상의 사람이 존재할 때만, 혹은 그만한 수의 사람들이 연루되어 있는 상황일 때만 지켜져야 할 무언가로 상정되지만, 규범이나 그러한 태도는 설령 아무도 '나'를 지켜보고 있지 않더라도 지키게 되는 문화적 습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생물학적인 의미에서도 '나'를 가지고 있지만, 사회적인 의미에서 '규범적 자아'도 가지고 있다. 이 규범적 자아라는 게 꼭 사회에서 정한 규칙을 준수하려는 마음을 뜻하진 않는다. 사회에서 파생된 자아라는 건 사회적 규칙에 생물학적 자아가 자신의 성장 과정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경향성을 의미한다. 즉, 엄숙하고 금욕적인 성향을 고수하는 사회에서 그에 대한 반항으로 전혀 다른 방식의 태도를 추구하는 것 또한 일종의 규범적 자아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런 맥락에서 규범 또한, 문화적이면서 상대적인 개념이다.





  이들과 배려의 차이는 뭘까? 일반적인 용법에 따라 생각해보면, 배려는 일종의 '사적인 예의', '사적인 규범'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배려는 예의나 규범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개념이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특정한 방식의 절차에 의존하지 않으며, 고착화되어 있지 않고 보다 자유롭게 교환되는 무언가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구분 또한 의미 있는 통찰을 시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보다 배려가 상술한 것처럼 예의나 규범의 하위 범주로 포섭되는, 좁은 의미의 무언가가 아니라 그들과는 별개의 고유한 무언가 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는 '규범적으로 행동함으로써' 타인을 모욕할 수 있다. 혹은 '예의범절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상대방을 무시할 수도 있다. 즉, 예의와 규범이 지켜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배려는 부재할 수 있다.


  사실 누군가를 배려한다는 말은 일상적으로도 자주 쓰이는 말이기도 하고, 그 의미 역시 복잡할 것도 없어 누구나 직관적으로 그게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단어다.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 또한 이제는 상투적으로 들릴 정도로, 배려는 문화인의 기본적인 옵션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흔하게 쓰이는 만큼, 사람들은 '배려'와 관련된 상황에서 많은 갈등과 오해를 겪기도 한다. 이를 누구나 알고 있는 방식으로 정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입장에서 배려였던 것이 타인에겐 그렇지 않을 수 있고, 타인의 배려 역시 나에겐 그가 의도했던 바와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배려의 근본적인 의미를 고찰해보기 전에, 우선 이 문제를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상대방의 배려가 불쾌해지는 이유는 무엇이며, 나의 배려가 타인에게 불편한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지금까지 짤막하게 언급됐던 내용을 돌이켜보면 적어도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가능해진다. 예절을 지키는 것과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타인을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의범절을 지키곤 한다. 하지만 배려가 필요한 상황에서 예의를 앞세울 경우, 상대방의 고유한 감정이나 처지는 소외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예의는 이름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온 고유한 존재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존재의 바깥에 존재하는 형식화된 절차를  수행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의의 교환 속에서 개인은 아무개가 된다. 예의를 지키는 자,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는 이름을 상실한다. 그곳에 존재하는 건 형식적인 몸짓과 말투, 그리고 '전형적인 얼굴' 뿐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얼굴'은 볼 낯이 없다거나, 면목이 없다는 관용구 안에 들어 있는 사회적 체면의 표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절이 모든 종류의 감정이나 주관을 배제하고 오로지 기계적인 형식으로만 존재하거나 수행된다는 건 아니다. 사람은 실제로 존경심을 가지고 있거나, 감정적으로 대단히 호의적인 타인에게 그에 걸맞은 예의범절을 지키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이 경우, 예의에는 고유한 타인의 명예를 추켜세우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그가 아닌 다른 누구였더라도 존재하지 않았을, 그런 고유한 존경심이나 경외감 같은 것이 예의 바른 태도 안에 내재되어 있을 수도 있다. 예절은 그런 종류의 주관을 표현할 때도 쓰인다. 하지만 사실 이런 식의 예외를 일일이 살피는 건 논점에서 멀어지는 길이다. 칼은 누가 어떤 상황에서 쓰냐에 따라 도출해내는 결과가 현저히 달라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은 날카롭다'라는 그것의 고유한 속성이 다양한 사례에 좌우되진 않는다. 날카롭지 않다면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칼이 아니다. 예절 역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든 간에, 그것의 본질이 형식적인 의례며 사적인 감정 표현의 방식으로 고안된 절차는 아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본래의 논의로 돌아와서 다시금 강조하자면, 배려가 필요한 상황에서의 예절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예의 바르기 짝이 없는 누군가의 태도가 종종 불쾌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종종 타인이 정형화된 의식이나 태도에서 벗어나, 고유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태도를 보여주길 바란다. 그가 자신의 머리로 스스로 생각해, 자신이 주관적으로 옳다고 믿는 바나 적어도 상황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그 가치관대로 행동해주길 바란다. 그렇게 그의 인간성을 보여주고, 그러한 인간적인 면모로 '나'를 인정해주길 바란다. 여기서 도출되는 배려의 속성 중 하나는 그것이 '타인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자 하는 감정적 태도'라는 것이다. 이는 정해진 형식을 준수한다는 맥락에서 옳고 그름으로 나뉘는 예의의 문제와는 동떨어진 속성이다. 이 경우 배려는 적합도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배려의 적합성과 관련하여, 위에서 정식화된 문제의식에 관한 다른 답변도 가능하다. 서로의 배려심이 어긋나는 경우가 예의범절에서만 발생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배려의 주요한 속성 중 하나가 '타인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자 하는 감정적 태도'라면, 그러한 태도가 발현되는 말이나 행동에서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즉, 사람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고, 걱정하고, 상대방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경우에서조차 타인에게 심지어 폭력적이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원치 않은 배려와 관심은 일종의 폭력이라는 주장은 그것의 타당성을 떠나서 수긍할만한 여지가 있다. 이런 종류의 괴리는 인간사에 있어서도 대단히 비극적인 사례 중 하나다. 이 같은 괴리로 발생하는 것이 단순히 감정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부정과 비난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좋은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던 사람의 마음이 상대방에게 공포심이나 불쾌함을 심어주게 되는 경우,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다. 예의를 부정하는 건 오롯이 상대방(부정하는 자)의 무례함이며, 그것은 인간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의례에 대한 부정에 국한된다. 하지만 배려를 부정하는 건 인간의 감정, 진실한 태도 등 본래적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영혼에 상처를 입는 일이다. 


  요컨대, 배려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가치관의 차이가 포함되어 있을 경우, 설령 그것이 진실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은 불쾌함을 느끼거나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런 경우는 타인을 고려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적합한 방식으로 표현하느냐의 문제에 대해선 무지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즉, 이런 사람은 타인에 대해 생각하긴 하지만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배려는 감정적인 태도지만, 감정에 국한된 개념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유연한 대처와 그에 걸맞은 기술이 필요한 개념이다. 배려의 조건이나 방식을 규정하는 데 있어 개인의 가치관이 짙게 반영되기 때문에, 가치관이 다양한 만큼이나 배려를 인식하는 방식 또한 다양하다. 그런 의미에서 또한 배려는 예의나 규범과는 다르다. 예의나 규범은 상대적이고 문화적이지만, 여전히 정형화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배려에 대한 요구가 일반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는 배려라는 개념 자체가 정형화된 다른 것들과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경우에 따라 존재론적으로 비슷한 지향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는 남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호감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내가 느끼기에 민감한 종류의 질문을 남발하는 사람을 보고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이를 본 적이 있다. 그는 그 사람의 무례함에서, 즉 예의의 부재에서 특정한 방식의 배려심을 느꼈던 것이다. 배려에 대한 기준은 이렇듯 비정형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합한 배려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태도는 '상대방 역시 나와 같을 거라는 독단'을 경계하는 것, '남들이 그렇듯 저 사람도 으레 그럴 것이라는 편견'을 극복하는 것이다. A가 대단히 슬프고 우울한 사건을 겪은 뒤 친구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상황에서, 친구가 의례적인 절차에 따라 '정형화된 위로'와 '표준화된 공감의 표정'을 건네는 것은 그에게 모욕적일 수 있다. 이 경우, 친구는 예의 바르게 행동했지만 A는 그것을 '아, 이 친구는 나의 사정을 다른 모든 사람이 비슷하게 겪는, 뻔하고 흔한 이야기로 듣고 있기 때문에 단지 기계적으로 맞장구나 쳐주고 있는 거구나'라고 느낄 수 있다. 상술했듯이, 이런 상황에서 A가 겪은 고유한 사건, 그의 고유한 정서나 마음은 소외된다. 이는 마치 누군가의 연애담을 듣고 뻔한 사랑 노래를 떠올리며 손뼉을 치는 것과 같은 방식의 모욕이다. 모든 이에게 사랑은 환원될 수도, 표준화될 수도 없는 고유한 이야기 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경우에 따라, 예의 바른 사람보다 다소 제멋대로 굴면서 격의 없어 보이는 사람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아마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지 마음대로 구는 사람들은 결국 알게 모르게 무리에서 배척당하기 마련이지만, 표준화된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적극적으로 배려하는 사람은 주위에 사람을 끌어들이기 마련인 것 같다. 배려는 상대방을 인간으로 보고, 그를 이해하면서 감정적으로 대우해주는 일이다. 그것은 문화와 사회 분위기에 분명 영향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전형(典型)에서 벗어난 마음이다. 이런 맥락에서,


  배려는 고유한 개념이면서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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