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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Jun 03. 2021

쳇바퀴가 전해주는
삶의 가치

#20. 숙달.


  어렸을 때 봤던 만화에서 들었는데,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대사가 있다. 이것저것 해봐야 알 수 있는 게 있는 반면, 한 가지만 고집스레 파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대충 그런 메시지를 담은 말이었다. 이는 일견 전통적인 맥락에서의 '장인 정신'을 뜻하는 주장 같기도 하다. 지금 같은 시대에 누가 이런 말을 하면 아마 꼰대스럽다는 평을 먼저 들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됐다고 해서 전부 낡은 가치는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해볼 때, 무언가에 장기간 전념하는 경험으로부터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이 마냥 허황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아무리 다원화된 사회고, 또 자본주의적 낭만에 따라 풍부한 경험에 높은 가치를 매기는 시대라곤 하지만, 영혼이나 장인 정신과 같은 신비스러운 표현을 차치하고서라도,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이러한 믿음은 오롯이 비과학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과거의 잔재일 뿐인가?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의구심이 있다. 어떤 일을 반복하는 데 있어 똑같이 수행해도 왜 누구는 그것을 더 잘하게 되고, 누구는 실력이 그대로거나 퇴보하는 걸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재능, 즉 타고난 역량의 차이 때문이라는 답변이다. 이러한 종류의 답변을 옹호하는 사람들─이하 재능 지상주의자─은 재미나 흥미를 붙이는 것도 일종의 재능이며, 그에 따라 노력을 지속하는 것 또한 재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설령 동일한 시간 동안 동일한 양의 작업을 수행해도, 그들 간의 타고난 기질적 차이에 따라 산출되는 결과값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가능한 설명이다. 하지만 불충분한 설명이기도 하다. 이러한 종류의 시각은 대개 결과주의적이다. 예컨대 A라는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 특정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으면, 재능 지상주의자들은 그를 보고 그 분야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최고 수준의 운동선수들이 같은 분야의 다른 선수들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이들은 소위 말하는 공부 머리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자에 크게 좌우되며, 기타 성품이나 성격도 대개 태생부터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성격적 특질이나 의지의 자유로운 발현 여부에 따른 차이는 차치하고서라도, 재능 지상주의자들은 보다 탁월한 결과값을 산출해내는 것이 실력의 척도인 모든 분야에서 재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재능이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열매라기보다 씨앗에 가까운 요소라고 봐야 할 것이다. 즉, 누군가의 재능을 논하고 싶다면 그가 '결과적으로' 도달한 영역에 따라 그것을 분류할 게 아니라, 그가 '태생적으로' 품고 있었던 선천적 자질에 대한 증명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재능이 반복에 따른 숙달의 결과값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주장은 독단적인 결론을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


  먼저, 재능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이가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를 산출해내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재능이라는 게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의 요소, 사고 행위의 능력 및 가치관 정립이나 감정적 스펙트럼 등을 포괄하지 않는 기능적 기질이라면, 이 경우는 꽤 이상하다. 재능이 기능적 기질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타고난 역량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유효한 결과를 나타내는 결정적인 요소라면, 재능이 있는 자는 그 분야에서의 반복을 통해 필연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젊은 천재의 몰락이라던가, 유년 시절의 탁월한 성취를 보이던 이들의 재능이 소진된 것처럼 보이는 경우 등 우리는 타고난 기질에 대한 섣부른 판단의 실패를 숱하게 맛본다. 이 경우 재능 지상주의자들이 가능한 대응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실패한 유망주'는 애당초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사람들의 성급한 판단으로 재능과 관련된 잘못된 분류가 이뤄졌다는 반론이다. 이 경우, 이들은 앞서 지적한 대로 '결과적으로 그가 도달한 영역'에 따라 재능의 여부를 판정하고자 한다. 이들의 태도를 견지한다면 재능에 대한 주장은 탁월함에 대한 가능성을 뜻하는 게 아닌, 단지 탁월함이 드러난 현장에서 공허하게 한탄하고 있는 패배주의에 가까운 호소에 불과하다.


  두 번째, 기능적 기질과 더불어 그것의 발전을 지속케 하는 심리적, 감정적 요소까지 재능으로 포함하는 것이다. 사실 어떤 기능적 성취나 능력이라는 건 우리의 정신적 속성을 배제하고 논의할 수 없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확장은 재능 지상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논지를 스스로 약화시키는 양상을 초래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경우, 탁월한 성취는 타인과 명백히 구별되는 기능적 기질뿐만 아니라 모두가 대개 비슷하게 가지고 있는, 혹은 동일한 훈련 과정을 통해 비슷한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정신의 일반적 속성'에 많은 부분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말하자면 동일한 문장을 보고 동일한 내용을 표상할 수 있는 능력이 동일한 지향성을 산출해낼 수 있고, 이렇게 산출된 다양한 정신성이 개인의 역량을 발전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2. 


  재능 지상주의자들은 재능이란 증명되는 것이며, 각 분야의 정점에 달한 이들을 가리킴으로써 숙달에서의 재능이 가지는 의미를 강조한다. 즉, 1등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은 노력을 해서 얻을 수 있는 지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주어진 물리적 시간은 똑같다. 그렇기에 동일한 시간 동안 다른 결과를 산출하는 기능적 기질이 중요하다. 재능 지상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농구 선수(혹은 그 후보들)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농구 선수 중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혹은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이는 축구나 야구, 혹은 연구나 학업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일정 부분 타고난 기능적 기질에 따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태생적 혜택을 누릴 수 있었기에,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러한 종류의 기여가 없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사실 이 주장은 1번의 내용에서 어느 정도 규명되긴 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세계 최고의 선수라는 지위가 가장 많은 노력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듯이, 그가 세계 최고의 재능(기능적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증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직관적으로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어려운 생애를 이어가다가 사망하는 사람의 전형을 떠올릴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나고 자라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데 재능이 일종의 가능성이고, 결과로써 나타나기 이전에 그가 가지고 있었던 소질이라면, 그렇게 죽은 이들 중 세계 최고의 체스 선수가 타고난 재능을 웃도는 기능적 기질을 가졌던 사람들이 없으리라곤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재능 외적인 수많은 요인들 때문에 그런 생애를 보내게 됐던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재능 지상주의자들의 일반적인 주장을 구구절절 반박하는 이유는, 반복과 숙달이라는 키워드의 적용이 재능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단순한 가치관을 논의에서 배제하기 위해서다.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 반복에 따른 숙달 정도의 차이를 야기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왜 누군가는 매일 같이 반복되는 하루에 진저리 치면서 생명력을 고갈시키고, 다른 누군가는 동일한 삶의 굴레 속에서 자신의 자질을 발휘하고 더 발전시키며 생기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걸까? 나는 이에 대한 가능한 대답으로써, 특정한 삶의 태도를 지적하고자 한다.


  현대 사회의 많은 일상 속에 전자의 인상이 지배적인 이유는 아마 '다양한 경험'의 중요성이 작금의 시대에 강조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기치 하에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즐기는 걸 생산적인 활동이라고 여기거나, 다재다능을 지향하면서 한 우물만 파는 방식의 삶을 고루하고 무식하다고 비웃는다. 물론 다채로운 경험과 지식이 가져다주는 삶의 증진이 중요한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기존에 의식하지 못했던 것, 느끼지도 감상하지도 못했던 것을 체험하는 새로운 경험은 삶을 고양시키고, 더 넓은 사고의 틀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지금 사회에서의 대부분의 문제가 좁은 세계관에서 비롯되고 있는가? 오히려 공허하게 넓기만 한, 다채로운 경험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한 채 "다음!"만 외치고 있는 쾌락지향적 낭만주의가 사회와 삶을 병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반복되는 일상에 활기를 불어다 주는 건 '비일상적인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며, 낙관적인 기대에 따른 탈선을 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은 '길게 이어진 고통을 그 사이사이 짤막하게 형성되어 있는 달콤한 순간에 기대어 견디는 인고의 시간'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삶의 초점은 항상 연휴나 방학, 주말과 같은 휴일이나 언젠가 다가올 미래의 어느 시점에 맞춰 놓는다. 마치 그 순간만 도래하면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고, 삶의 과장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처럼. 이는 일종의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이다. 자신의 지루한 일상을 구원해줄 '경험적 메시아'의 도래를 기도하고 계획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내세를 위해 삶을 견디는 것과 삶의 일부를 위해 나머지 전체를 희생시키는 것은 구조적으로 다를 게 없다.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다. 비일상적 낭만을 인생의 테마로 추구하는 사람에게 반복되는 일상, 대부분의 삶을 차지하고 있는 쳇바퀴 같은 시간들은 단지 견뎌내야 할, 달력에서 지워나가야 할 날짜들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는 똑같은 작업을 매일 같이 반복해도 투자 대비 유의미한 성취를 이뤄낼 수 없으며, 단지 시간을 소비하는 요령을 길러낼 뿐이다. 반면 삶 전체를 체험의 공간으로 인식하는 사람, 반복을 '똑같은 일의 재현'이 아닌 '삶을 고양시키는 기능적 숙달의 과정'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모든 영역에서 발전한다. 이는 기초 체력 운동의 반복을 통해 신체 기능 전반을 발달시키는 사람이 어떤 종목의 운동이든 더 빨리 배우고 더 잘하게 된다는 맥락과 일치한다. 반복을 통해 발전을 도모하는 사람, 그 가치를 이해하고 삶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반복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무언가'를 이미 깨닫고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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