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현대 가정의 한 형태를 설명하는 다소 자극적인 예시를 접한 적이 있다. 기사에서 봤던 건지, 책의 한 구절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혹은 누군가에게 들었던 내용일 수도 있다─, 예시의 핵심은 요즘 가정의 양상이 흡사 '바퀴벌레'와 같다는 내용이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예컨대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서 TV를 보다가 아버지가 들어오면 각자 본인의 장소로 흩어진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들 방에, 아내는 안방이나 부엌으로 말없이 이동한다.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불을 켜면 순식간에 흩어지는 바퀴벌레의 모습처럼. 물론 이 같은 모습이 꼭 아버지와 나머지 가족 간에서만 도출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쩐지 특정한 전형(典型)을 묘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의 가정의 붕괴, 가족들 사이에서의 소외, 혈연 사이의 어색함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예시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부모가 주도하고, 또 그래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핵심은 자식이 부모를 어떻게 여기는지에 있다.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대했든 자식이 부모를 편하게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여기면 가족 관계는 화목함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자식이 부모를 불편하게 여기고, 그 사랑에 의구심을 품는다면 가정은 어색해진다. 후자의 경우, 부모가 자식을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만큼의 상황이 진행됐다면 문제는 그들의 마음이 아니라 행동, 태도일 테니까.
가정의 모든 문제를 부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키우는 건 어려운 일이다. 누구나 완벽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육아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사실 많은 경우에 운에 맡기며,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가 별 탈 없이 자라길 바라는 바람만을 가지고 육아에 임하게 된다. 그것은 다양한 현실적 문제와 개인의 한계, 그리고 아이의 성장에 따른 불가측 변수들에 의한 일종의 체념이다. 이와는 반대로 극단적으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관리하려는 부모도 있는데, 이들의 경우도 결국 인간에 대한 서툰 이해와 아이를 물건(소유물) 취급하는 자본주의적 관념이 투사된 결과다. 어느 쪽이든 가정 분위기는 부모에 의해 결정된다.
가족의 성장은 비단 자식의 성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육아를 하는 과정에서, 또 부모로 사는 시간 동안 집 밖에서도 어른들 역시 성장한다. [가족]은 부모와 자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끊임없이 서로의 관계를 조율하는 과정의 이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은 '완성'되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명칭은 어떤 결과에 주어진 이름표가 아니라, 지속적인 변화를 총칭하는 프로세스를 일컫는 말이다. 가정의 많은 '전형적인 문제'는 이 같은 사실을 부모가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망각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들은 대개 자신이 속해 있는 가족의 속성을 규정하고 고착화시키려 한다. 우리 가족은 이렇다던가, 우리 아이는 이런 아이라던가, 배우자는 이런 사람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존의 이미지'에 집착하는 이런 종류의 규정은 실제 모습과의 괴리를 만들어내고, 나아가 서로에 대한 분노와 실망을 표출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경우,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의 변화와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기존의 기대와 바람만을 서로에게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다소간의 '연극'을 통해 충족시키는 건 가능한 일이다. 마치 예전 그대로의 자식인 것처럼, 예전 그대로의 부모인 것처럼 서로에게 연극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면, 그 가정은 겉으로나마 화목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이는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 아니다. 이러한 가족은 근본적으로 서로에게 어색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도 자식과 어색해지길 바라지 않는다. 반면 자식의 경우에는 이 같은 일반화의 적용이 모호할 수 있다. 왜냐면 아이들이 부모에게 갖는 관념은 부모의 말과 행동,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자녀들은 '어색한 가정 분위기'가 오히려 생활하는 데 편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가족 간의 사랑'이라는 관념은 생물학적인 내용도 포함하고 있지만, 사실 어느 정돈 관습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것이 모든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무언가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사실 많은 경우, 당위의 표현으로 사용된다. 가족 구성원들끼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집합체에서 부모의 역할, 노력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숱한 사람들이 "가족끼리 무슨 노력을 해? 그냥 가족은 가족이고, 혈연은 끊을 수 없는 거니까 안고 가는 거지", 라는 생각으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방치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어긋난 가족 관계에 대해 "왜 이렇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온갖 곳에 호소한다. 많은 유튜브에서의 영상이나 TV 속 고민 상당 프로그램에서의 내용이 그런 식이다. 그들은 진정 마주해야 할 이들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으면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혹은 자기중심적인 공허한 노력만을 강요하면서─ 한숨만 내쉬고 있는 셈이다.
부모로서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로 취급하면 안 된다는 종류의 강연이나 조언은 이미 숱하게 들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극복하기 어려운 가치관이다. 왜냐하면 '사실'의 측면에서, 부모는 아이에게 그의 삶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준다. 많은 경우 부모는 그 모든 시간과 투자를 기억하고, 기억하려고 한다. 반면 자식들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거나(너무 어렸을 때니까), 깊은 주의를 기울여 의식하진 않는다. 그렇기에 자식을 위해 '희생'했다고 여기는 부모들, 아이들에게 '투자'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 자녀의 미래를 위해 '헌신'했다고 여기는 부모들은 가장 괴로운 종류의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부모가 자식에게 은연중에 '대가'를 바라는 순간, 자신의 기여를 회수하려는 순간 가정은 '시장'이 된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가정은 교환 가치가 우선되는 거래의 장이 되기 때문이다. 사교육 뒷바라지와 좋은 성적, 온화한 부모의 모습과 탈선하지 않는 모범생 자녀, 경제적 원조와 집안일 할당 등의 가치 대비 거래가 가정을 시장으로 만든다. 판매자와 소비자는 근본적으로 어색한 관계이며, 비열함을 초래하기 쉬운 관계다. 시장은 무엇보다도 이익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모는 좋은 의도에서라도 자녀에게 시장 논리에 따른 거래를 제안하거나, 그러한 가정환경을 구축하려고 해선 안 된다. 이는 단지 자신에게 이로운 걸 쥐고 있는 상대방에게 비굴해지는 방법을 가르치는 훈육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가정이란 무엇이고, 좋은─어색하지 않은─ 가족 관계를 지속해나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가정의 사정이나 세부적인 요소들은 전부 다르기 때문에, 어떤 획일화된 이미지를 정답이라고 내세울 순 없다. 어떤 가정에게 더없이 좋은 방법이, 다른 가정에게는 최악의 방식일 수 있다. 하지만 물론 몇 가지 큰 그림을 그리는 원칙은 존재한다. 여기서 짚고자 하는 원칙은 두 가지다.
첫 번째, 부모는 자식에게 베푼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 내가 아이의 생존과 안전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는, 그의 생사여탈권을 사실상 내가 쥐고 있었다는 사실, 나의 경제적 원조가 없다면 지금 아이가 누리고 있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 부모로서의 무조건적인 자식 사랑이 아이에게 중요하고, 또 내가 그것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야만 한다. 그렇게 모든 시혜를 잊어야만 부모와 자식은 보다 친밀하고 대등한 관계로 눈을 맞출 수 있다. 내가 베푼 것에 대한 대가를 아이에게 바라는 순간, 아이는 그 빚을 청산하는 것을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목표로 설정하게 된다. 즉, 부모는 아이의 입장에서 채권자가 된다. 이 경우, 아이는 부모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추느라 진심을 숨기고, 비굴해지거나 반항하면서─어차피 부모에게 받은 모든 빚을 청산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채무 이행 자체를 포기하는 아이의 경우다─ 인격적인 성장을 멈추게 된다. 즉, 비유적인 의미에서, 아이는 노예가 되거나 범죄자가 된다.
두 번째, 가정은 가족 구성원에게 있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는 어느 시점부턴 쌍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과제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또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가 서로의 고향이 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부동산의 측면에서 특정한 거주 공간을 점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른 가족 구성원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는 심적인 장소, 모든 도전과 자립을 응원하고 독려하며 서로의 안전망이 되는 관계, 가정은 그런 성격을 지향해야 한다. 만약 한 가족 구성원이 다른 이에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강요하거나, 최선이라고 여기는 선택지를 고르라고 강제한다면, 이는 상술한 맥락에서 대상을 소유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인간은 조종할 수 없다. 오로지 물건이나 게임 캐릭터만 조종할 수 있다.
자신이 선택한 문제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선택을 하거나, 반성을 통해 조정해나가면 되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이 선택해준 문제는 자신이 해결할 수 없다. 이 경우, 실패를 경험한 이는 남 탓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은 서로를 통제하려고 하면 안 된다. 이는 단순히 서로를 방치하고 방조하라는 말이 아니다. 서로를 지켜보고, 의견을 교환하고, 성공을 축하하고, 실패를 독려하라는 뜻이다.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가정은 구성원들에게 불편한 곳이 된다. 또 한 소리 듣게 되는 곳, 나를 위한답시고 잔소리만 해대는 곳, 감정의 배설을 수용해야만 하는 곳─그들의 배설이 '사랑'에 근거한다고 믿어야 하기 때문에─이 된다. 사랑과 걱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사디즘과 통제욕이 개입할 때, 조언은 잔소리가 된다. 이 잔소리는 어떤 '의도'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솔직한 소통을 가로막는 최악의 장애물이다. 잔소리가 만연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후천적으로 가족을 이뤄본 이라면 누구나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일인지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그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에 익숙해지면서 점점 무뎌지고, 결국엔 어떤 문제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게 된다. 소위 말하는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며, 이젠 뻔하고 반복되는 일상이 계속되리라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은 상기한 의미에서 언제까지고 완성될 수 없다. 모든 구성원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래야 하며, 그에 맞춰 가족 관계나 가정의 분위기도 유동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아무도 노력하지 않으면서 서로에게 충실하고 화목한 가족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은 환상이다. 그러한 환상을 버리고 가정을 위해 대가 없이 헌신할 때, 동시에 서로의 존재와 삶을 존중하고 배려할 때, 우리는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지속해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