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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Jun 28. 2021

정보, 기능성, 잠재적 연결

#22. 잠재(潛在), 자아.



  정보는 우리의 주변에 산재해있다.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당신은 알고 싶은 대부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방법도 간단하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검색만 하면 된다. 우리는 신뢰할만한 정보를 얻기 위해 예전처럼 도서관에 머무를 필요가 없어졌다. 컴퓨터 기술이나 인터넷의 필터링 능력이 제한적이었던 과거와 달리, 온라인 정보의 얕은 수준을 비웃는 피상성에 대한 지적이나, 오로지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조장되는 정보의 편향성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당신은 당신이 전혀 동의하지 않는, 반대하는 정치적 진영 사람들의 의견이나 연구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평소에 전혀 관심이 없던 분야의 내용, 읽는 데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깊이 있는 글이나 동일한 주제어에 대한 다각적인 견해를 동시에 검색할 수도 있다. 능력이 받쳐지기만 한다면, 격식 있는 토론이나 논의를 위해 각종 국내외 서적, 단행본을 찾아볼 필요도 없다. 해당 분야의 최신 논문, 주제에 대한 명망 있는 에세이를 인터넷 상에서 잠깐 훑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그럴듯한 한 두 마디를 대화에 얹을 수 있다. 아마 심지어는 그 편의성에 취한 나머지, 그 이상의 지적 성취나 수행은 필요치 않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보에 대한 손쉬운 접근과 그 기술적 성과에 언제든 연결될 수 있는 상태 속 개인은 그 자체로 '잠재적 확장성'을 포함하고 있다. 마치 신체의 일부이자 연장으로 간주되는 안경이나 지팡이처럼, 정보화 시대의 개인은 언제든 정보에 연결될 수 있는, 온라인의 지평에 접속할 수 있는 기능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가능성의 실현은 제한적으로나마 그의 실제적 기능성을 확장하여 보여준다. 더 낮은 시력을 가진 사람이 안경을 통해 본래의 신체적 기능 이상의 초점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자아를 하나의 종합적인 정신 상태로 전제하고, 그것이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추상체의 본질이라고 본다면, 개인의 자아는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구현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 사회의 자의식은 한없이 팽창된 상태(단지 그 가능성만으로도)를 유지하고 있고, 사람들 역시 실제로 그 자의식 과잉이 스스로에 대한 사실적 인식이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자주, 외부에서 주어진 것을 자신의 본래 모습의 일부라 착각한다. 자동차나 최신 스마트폰, 의류나 거주 공간 등에 자신의 가치나 자의식을 투영하듯이 말이다.


  끝없이 팽창되는 현대적 자아의 증거는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각종 SNS에선 말할 것도 없고, 보정된 사진의 가치나 연출된 이미지, 가수나 배우를 비롯한 연예인, 유명인에 대한 인식이 그 적나라한 예시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존재론적 격차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개개인의 존재에 대한 극단적인 가치 평가의 차이는 사람들의 편향이나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식당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지만, 셀럽이 찍은 사진이나 사실만이 이슈가 된다. 매일 같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유명인의 죽음만이 보도되고 대중의 추모를 받는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건의 음주운전 사례가 적발되지만 한두 명의 연예인의 사례만이 부각되어 다수의 지탄을 받는다. 내가 볼 때, 이 같은 사실들의 정당성이나 부당성을 논의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오히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는 항상 개인에게 개인 이상의 것을 보며,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서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이는 능력과 가능성의 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종종 사람들은 '할 수 있는 것'과 '해내는 것'의 가치를 사실상 동일 선상에 놓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비교 양상은 '인터넷과 자아의 잠재적 연결 상태에 관한 관념'의 응용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현대적 자아는 스마트폰이나 PC를 통해 언제든 원하는 정보를 취합하고, 자신의 정보나 이미지를 보정하여 게시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잠재적으로 개인은 실제 이상의 무언가로 현현할 가능성을 자신의 '실제 자아' 안에 포함된 요소로 간주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그로 인해 발생할 성취의 결과와 동일시한다. 혹은 적어도, 성취에 대한 직접적인 예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행되기 직전까지도, 무언가에 대한 가능성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잠재력은 허상이며, 필요에 의해 요청되는 기술적(技術的) 은유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팽창된 자아에 대해서도 같은 종류의 비판이 가능한가? 이는 사실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물론 우리는 많은 경우, 지능의 기능적 수행을 외부의 매체나 정보에 의존한다. 기억력을 기계적 저장장치에 옮겨 놓고, 비판적 사고 능력은 칼럼이나 에세이에서 빌려 쓰며, 성취감은 타인의 연구 실적이나 탐구에서 가상적으로 채취한다. 감정의 다양한 경험과 체험은 드라마나 웹툰,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이뤄진다. 이처럼 복합적으로 진행되는 '자아의 외주화'는 여러 종류의 비판을 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개체가 원래 그런 존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백지상태로 태어나 다양한 종류의 외부 자극과 환경의 요청에 따라 자아를 확립해나간다. 많은 것을 기억하고, 또 그만큼 많은 것을 잊는 순환 속에서 개인은 태어날 당시의 그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로 변모해간다. 하지만 그중에 개인에게 고유한 무언가가 하나라도 있을까? 유전자는 부모에게서 받고, 지식이나 가치관은 교육이나 책, 또래나 각종 콘텐츠로부터 획득하고 형성한다. 감정의 스펙트럼은 외부 경험에서 연원된다. 애당초 '개인'을 구성하는 것 중 무엇 하나 고유하고 독립된 요소가 없고, 단지 그 모든 것들이 한데 뭉쳐 범벅이 된 무언가를 자아라고 부른다면, 현대적 자아의 팽창된 영역 역시 그러한 종류의 구성 요소라고 간주해선 안 될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고 해서, 과잉 자아가 비판의 시험대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비판의 초점을 조정하는 과정에서의 논의에 해당한다. 현대적 자아가 자신의 것이 아닌 무언가를 자기라고 착각하고 있고, 팽창되어 나타나는 자의식 과잉은 본래의 개인을 심각한 수준으로 왜곡하기에 건전한 자아라고 볼 수 없다는 비판은 일견 필요한 지적처럼 보이지만, 사실 핵심을 비껴가고 있다. 보다 타당하게 제기될 수 있는 논점은, 다소 거칠게 표현하자면, 과거의 형태와 비교해 볼 때 지금이 더 낫냐는 것이다. 즉, 정보의 홍수로 대변되는 사회, 개인의 자아와 지적 기능성을 보조해줄 수 있는 수단이 주어져 있는 시대의 자아는 그 이전 시대의 전형적인 자아상과 비교해볼 때,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퇴보에 불과한가?


  확실한 건, 잠재적 연결 상태를 유지하는 건 기분 좋은 자의식을 손쉽게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내가 당장 공부만 하면 원하는 성취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기대어 다른 취미 활동을 한다거나, 보정된 얼굴 사진을 게시하며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믿음을 만끽하거나, 1분 전에 어디서 눈팅한 분야의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마치 오랫동안 공부해온 사람처럼 허세를 부린다거나 하는 일은 별다른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한껏 과장된 자아의 욕구를 간단히 충족시켜준다. 현대 문화 산업의 근저에는 이 같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주력하는 노력이 깔려 있다. 우리는 잘 제조된 만족감을 그저 유튜브를 시청하거나 게임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섭취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숱한 비평가들이 독서의 중요성이나 오랜 사색의 능력을 강조하며, 현대적 자아를 앞장서 비판한다. 요즘 사람들은 깊게 생각할 능력을 잃어버렸고, 주의력이 지나치게 산만한 데다, 독서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 비평가들은 시대의 위험 징후를 읽어낸다. 반면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정보화 시대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동영상과 음성 매체의 발달로 인해 양질의 정보를 더욱 쉽고 빠르게 취득할 수 있게 됐으며, 기존의 선형적 사고방식에 비해 지금의 넓고 산발적인 발상력이 창의적인 인재를 형성하는 주요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즉, 과거에 장점이라고 여겨졌던 지적 속성을 예찬하는 건 단지 고루한 향수(鄕愁)에 취한 견해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추구할만한 방향성인가? 아니, 애당초 우리는 이 중 무언가를 선택할 능력과 조건 아래에 놓여 있긴 한 걸까?


 나는 무엇이 더 낫다고 확증할만한 정당화 기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망설이고, 상황에 맞게 노력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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