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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Jul 03. 2021

경쟁적 의사소통의 가치와 본질

#23. 토론.


  토론과 토의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경쟁적 성격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토의는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일종의 브레인스토밍 과정을 일컫는 말이고, 토론은 일반적으로 '찬성과 반대' 같이 주제에 대한 대립각을 형성하는 의사소통 방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적인 경쟁을 즐기는 몇몇 사람들은 토론을 일종의 게임으로 간주하고, 참여자들 사이에서의 승패를 가르려는 경향이 있다. 서로의 논리적 정합성을 따지고, 주장과 근거의 설득력을 평가하는 과정은 토론자에게 지적인 고양감을 안겨준다. 이 즐거움은 다른 말초적인 쾌락을 제공하는 대부분의 활동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것은 독서나 산책, 명상에서의 즐거움과 같이 경험자와 비경험자 사이의 입증할 수 없는 사실적 간극을 내포한 즐거움이다. 대부분의 온라인 게임은 그것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 게임의 즐거움을,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토론의 즐거움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토론이 즐겁다는 이들의 말에 공감할 수 없다. 독서나 산책, 명상하는 즐거움처럼 말이다.


  토론이라는 상호작용 절차가 가져다주는 효용은 명백하다. 그것은 일단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고 다듬는 능력을 향상시키며, 동시에 상대방의 말을 효과적으로 요약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증진시킨다. 즉, 토론은 의사소통 능력의 핵심을 골고루 발전시킨다.


  은연중에 전제되어 있는 주관적 입장이나 거기서 딸려 나오는 느낌적 의견을 논리적으로, 명료하게 표현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길을 잃고 헤매거나, 기존에 언급했던 내용을 잊어버린다. 그러다 보면 주장의 내용은 모호해지고,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공허한 문장들만이 사람들 사이를 부유하게 된다. 소통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집중력을 상실하고 산만한 주의력에 따라 말의 갈래를 이리저리 확장시킨다. 특정한 주제에 대한 의견 교환에서 비롯된 대화가 대부분의 경우에 '뭔가 지적인 대화를 했다'는 느낌만 남기고, 실질적인 결론을 발굴해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상대방의 말이나 주장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비판하는 것은 특히 어려운 일이다. 잘 듣는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든 환영받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심지어 고도의 지적 훈련 과정을 거친 사람조차 상대방의 말을 곡해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왜냐하면 사람이 뭔가를 읽거나 듣는다는 것은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해석의 절차를 수반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흔히 메시지는 메신저와 독립된 가치를 지닌다고 말한다. '살인은 나쁘다'라는 말이 옳다면, 그 말은 평범한 사람이 하든 연쇄 살인마가 하든 마찬가지로 옳다는 뜻이다. 하지만 실제로 메시지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선 소통의 맥락이나 발화자의 의도, 청자의 가치관이나 경험이 대단히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살인이 나쁘다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 말을 살인자가 하면 사람들은 불쾌하게 여긴다. 인종차별이 나쁘다는 게 사실이더라도, 그것을 히틀러가 주장한다면 사람들은 분개할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의 타당성, 정당성은 차치하고서라도 핵심은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리 중립적인 스탠스를 유지하려고 해도, 메시지를 해석하는 일에는 주관이 개입하기 쉽다. 점잖은 토론으로 시작됐던 의사소통 과정이 말싸움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이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적어도 우리 스스로 믿는 것보단, 잘 듣지 못한다.


  토론은 이러한 종류의 의견을 주장하고 해석하는 문제에 관해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즉, 토론은 토론 자체에 필요한 능력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다른 모든 종류의 의사소통에 필요한 능력에도 영향을 끼친다. 사람은 토론에서의 시행착오를 통해 보다 잘 말하고, 잘 들을 수 있게 된다. 


  토론의 다른 효용 중 하나는 의식적 깨달음과 인식의 확장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개인의 독단에 갇혀 있는 사람을 비웃는 관용구─'우물 안의 개구리'처럼─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이유는 그것이 그만큼 개인의 발전을 저해시키고, 인간관계에 있어 치명적인 결함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즐비하기 때문이다. 자기 인식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인지적 문제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인간의 심리적 메커니즘은 무엇보다도 타자와의 상호 작용 과정 속에서 그 복합성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타자와의 상호 작용'은 단순히 대화나 메시지 교환뿐만 아니라 독서를 포함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외부 개체와의 모든 상호 작용을 총칭하는 말이다. 사람은 이 같은 '타자와의 상호 작용' 없이는 일정 수준 이상의 인지적 진보를 기대할 수 없다. 인지적 고립은 일종의 사회적 자폐와 유사하며, 사람의 시야를 좁히고 분별력을 저해하는 몽롱한 상태를 유발한다.


  토론은 이 같은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실천적인 방법이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뇌는 기록 장치가 아니라 해석 장치다. 이 말인즉슨 예컨대 독서와 같은 새로운 지식과 견해를 탐구하는 과정에서도 뇌는 독단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의 의식은 자신의 믿음과 반대되는 사실을 쉽게 외면해버리고, 특정한 데이터를 본인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왜곡하여 해석하기도 한다. 외부 세계와의 상호 작용은 의식의 성장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그것들이 항상 발전을 야기하진 않는다. 오히려 고유한 방식으로 소화된 정보는 그의 독단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토론은 말하자면 해석 장치 간의 가장 적극적인 경쟁이다. 토론에 참여하는 각각의 해석 장치들은 서로의 독단을 용인하지 않고, 가장 교묘한 형태의 왜곡조차 잡아내어 상대방에게 시정하기를 촉구한다. 견해의 대립은 대개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각자의 발언에 대한 즉각적인 피드백을 경험하게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참여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주장을 검토하고, 더러는 의심하며 동시에 상대방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그것을 수용한 뒤 분석해야만 한다. 이 과정 속에서 사람은 좋든 싫든 자신의 아집에서 빠져나와야만 하고, 입장의 조정과 복귀를 반복하며 주장을 견고하게 재구축할 수 있게 된다. 즉, 사람은 토론이 진행됨에 따라 자기 내부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고, 기존에 공백으로 남아 있던 인식의 지평을 타자의 시선으로 말미암아 생산적으로 채워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도 토론은 즐거운 과정이다. 만약 어떤 활동이 아무리 많은 혜택과 효용을 가져다준다고 해도, 그것이 고행의 일종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며,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도 끊임없이 그것의 효과를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의견을 경쟁하는 과정에서 집단적 고양감을 느껴본다면, 기존의 자기 인식을 넘어서 새로운 인식의 지평으로 나아가는 경험을 체험한다면, 치열한 논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적 만족감을 경험해본다면 토론의 즐거움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즐거움에 비하면 사실 상술한 토론의 가치는 부차적인 요소들이다.





  하지만 그 본질을 망각한다면, 토론은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갈등을 초래하는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된다. 이 경우, 토론은 단지 자신의 지적 우월감을 뽐내기 위한 웅변의 장이 되며, 상대방에게 설득당할 용기조차 없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우렁차게 혼잣말이나 하는 시장통으로 만든다. 이렇게 되는 데 있어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토론을 '승패가 갈리는 승자 독식 게임'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미성숙한 자아를 지닌 사람들은 토론이 마치 상대적으로 가장 완벽한 논리 체계가 승리를 거머쥐는 콘테스트이며, 이에 따라 패배자들은 승자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만 하는 의무를 지고 있는 것처럼 여긴다. 이는 세상만사에 정답을 상정하고, 하나의 진리만을 고집하려는 지적 태만에서 비롯된 태도이다. 이러한 가치관을 견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토론은 단지 나를 내세우고 타자를 깎아내리는 나르시시즘의 축제가 된다. 달리 말하면, 그들에게 토론은 사회적 자폐를 촉진하고 강화하는 '반(反) 소통적 의사소통'인 셈이다.


  토론에 있어 승패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물며 토론의 결론이 항상 특정한 견해의 타당성을 칭송하는 형태일 필요도 없다. 이는 끝나고 나서 서로의 입장을 토론 하기 전과 똑같이, 각자도생의 방식으로 독단을 고집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경쟁은 토론을 즐겁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부당한 고집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토론에 임하는 참여자로서 중요한 덕목은 기존의 내가 가지고 있던 신념이 교정되어야만 하는 심각한 오류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주장이나 근거가 타당할 시, 부분적으로나마 언제든 '설득당할 용기'를 품는 것 또한 중요하다. 자신의 비합리적인 고집을 접고, 올바름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자기 발전을 지향하는 건 현명해지고 싶은 이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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