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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Jul 21. 2021

명예로운 삶

#24. 명예(Honor)


  현대 사회에 이르러 변화된 다양한 가치들에 견주어 볼 때, 명예는 다소 독특한 관념이다.


  우리는 누굴 보고 명예가 있다고 말하며, 어떤 행위나 태도에 명예의 관념을 부여하는가? 특이하게도 여기선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환영받는 여러 가치들이 힘을 못쓴다. 우리는 세상에서 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상상해볼 수 있지만, 그를 그러한 이유로 명예로운 사람이라 칭하진 않는다. 외모가 대단히 훌륭한 사람, SNS 상으로 수 백만의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 유튜버나 인플루언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할 순 있어도, 그들을 명예롭다고 칭할 순 없다. 적어도 외모가 훌륭하다거나, 단지 인기가 많다는 이유에선 말이다.


  어쩌면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명예라는 가치가 사람들에게 별로 와닿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돈이 많으면 만사형통인데, 뭣하러 명예라는 관념까지 추구한단 말인가? 명예가 밥 먹여주나, 하는 심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갖길 원하지, 더 많은 명예를 원하진 않는다.


  하지만 또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반적인 시선에서 갖출 건 다 갖춘 사람들이, 이상하리만치 명예나 명성에 집착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기업의 총수나 주요직의 인사가, 혹은 부동산 계의 거물이 정치를 시작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하게 목격한다. 또는 다양한 집단에서의 장을 맡기 위해 억 단위의 돈을 쏟아 붙기도 하고, 내세울 만한 직함(무슨무슨 클럽 회원이라던가)을 얻기 위해 나 같은 소시민의 입장에선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단순히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하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자신의 영역에서 다양한 종류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뭐가 더 필요해서 공직에까지 나서거나 시시콜콜한 사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걸까?





  여기서 명예의 획득이 인간의 본성적 욕구와 맞닿아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여길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명예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 명예가 유명세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명예의 본질적인 속성은 유명세와는 그다지 상관없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이를 두고 그에게 명예를 부여하진 않는다. 모든 생리적 욕구를 수월하게 충족하는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바라는 게 명예라면, 심지어 명예는 인간 본성이 요구하는 가장 높은 차원의 욕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명예의 정체는 무엇인가?


  명예는 일단 사회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타인의 존재, 자신의 외부를 구성하는 더 넓은 세계를 필요로 하는 개념이다. 1인 국가에서 추구할 수 있는 명예는 없다. 왜냐하면 명예는 일차적으로 사회에 대한, 일반 대중에 대한 공헌에서 비롯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군인의 과업을 명예롭다고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군인은 가장 직접적으로 사회의 안전을 보장하고자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직업이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마저 희생할 각오와, 사회에 헌신하고자 하는 직업의식에서 비롯된 자리다. 물론 불투명한 장래에 대한 걱정으로 보신을 위해 군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한 사례들 때문에 그 직업에 투사되어 있는 소명 의식이 바래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명예의 추구는 그 동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긴 하다. 명예사적인 이익 추구가 아닌, 공중의 복리와 사회의 안정에 기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추구될 때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다. 군인이라는 지위에 투사하는 감정이나 목적이 저마다 다를지도 모르지만, 군이라는 집단의 존재 목적이나 실제로 유지되고 있는 양상이 자국민의 안전과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기 위함이기에, 일반적으로 군인은 명예를 획득한다. 반면 기업은 그 본질이 사적 이익 추구이다. 그렇기에 개인을 떼어놓고 볼 때, 기업 회장의 직책 자체를 우리는 명예로운 자리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는 훌륭한 수완가일 수 있고, 정통한 사업가일 순 있지만, 명예로운 자는 아니다. 적어도 기업 회장이라는 이유에서는 그렇다.





  사회에 대한 희생과 헌신, 공헌이 명예의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그런데 이 명예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거나 추구된다. 하나는 단지 명성과 유명세를 쫓는 세속적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의 명령과 질서에 따라 행해지는 이상적 방식이다.


  전자는 타자의 인정과 허황된 인기에 목매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명예를 추구하는 자들은 타인의 공적을 가로채거나, 대중을 기만하는 방식으로라도 '명예로운 사람'이라는 가면을 쓰길 원한다. 이들이 추구하는 명예는 과장된 자기애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이다. 이는 타인의 시선에 집착하지만, 정작 타인에 대한 고려는 없는 모순적 심리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마치 명예를 소유물처럼 생각한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그렇게 획득한 명예를 우월함의 표상으로 여긴다. 그렇다 보니 결과적으로 그들의 명예 추구가 사회적 차원의 이익이나 공공복리에 기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러한 명예 추구는 자기애를 미덕으로 삼는 방향성을 지향하며,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를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반면 후자는 이성의 원칙과 양심을 준거로 삼아 발생하는 실천에 대한 명예다. 이는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숭고한 마음에서 비롯된 이성의 순수함이다. 감정이나 욕구에 매몰되어 있는 자는 이러한 방식의 명예를 추구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동물적 욕구 해소나 감각적 쾌락의 충족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말초적인 쾌감이 삶의 행복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는 사람, 내가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하면 만사형통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개인적 삶 너머에 있는 고귀한 이상을 인식할 수 없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그러한 이상을 토대로 발전하고 존속되어 왔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 다소 바보 같다고 여겨질 정도로 고집스레 사회에 헌신하는 사람, 말도 안 되는 선의로 세상을 마주하는 사람에 의해 사회는 유지된다. 그들은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묵묵히 제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존재론적 의무를 인식하고 그를 수행하는 삶이 명예로운 삶이다. 그들의 명예는 화려하진 않지만 숭고하다.


  후자의 경우에 있어, 저렇게 살아봐야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명예고 뭐고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명예의 개념을 전자처럼 생각하는 경우에서 비롯된다. 앞서 살펴봤듯이, 명예의 핵심은 사회에 대한 희생과 헌신, 공헌이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타인을 위해 일하고,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자들에게 명예의 가장 숭고한 측면이 실현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타인의 인정과 시선에 목매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성과 양심의 인도에 따라 더 높은 차원의 자기실현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명예와 자기를 실현하는 명예의 차이는 타인에게서 명예를 구하는 것과, 자신의 원칙과 행동에서 명예를 구하는 것의 차이다. 자기실현의 명예는 결국 자기 자신의 인격적 성장도 수반한다. 이는 실제 삶을 대하는 개인의 태도가 더 성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명예를 분별하는 게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나는 명예가 도덕적으로 길을 헤매고 있는 우리 사회의 개인의 삶을 교정하고, 추구할만한 지향점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상적인 명예의 관념은 인기나 지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도 사회에 대한 헌신과 공공복리에의 이바지를 실천하는 삶은 충분히 명예롭다. 말하자면 누구나, 어떤 자리에 있든 간에 그는 명예를 추구할 수 있고, 또 그러한 명예 추구를 자신의 인격적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다. 어떻게 사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사람들, 무엇이 좋은 삶이고 본질적으로 더 행복해지는 길인지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명예의 관념은 추구할 가치가 있는 삶의 태도이자 방향성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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