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채식주의(Vegetarianism)
왜 그들은 채식주의를 옹호할까?
현대 사회에서 채식주의를 옹호하거나 실천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여기서 다루는 '채식주의'에 대한 설명은 그 모든 종류의 실태를 소개하는 것이 아닌, 일반적인 의미의 '육식을 지양하고 채식 위주의 식단을 꾸려야 한다'는 소박한 논변의 원리적 근거에 한정한다. 상술할 내용의 목적은 "왜 채식주의자들은 육식이 나쁜 것처럼 말하고, 채식이 좋은 것처럼 말하는가?"라는 일상적인 질문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1. 공리주의적 견해 :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
첫 번째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선 먼저 공리주의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공리주의 하면 대개 '쾌락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이론', '행복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려는 시도' 정도로 취급하는 것 같다. 공리주의의 기본 전제는 모든 도덕 이론이 고려해야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인간 행위의 옳고 그름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이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당위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답변이 바로 '행복'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행복을 고려하여 행동해야 하며, 또 그것을 추구하는 삶이 도덕적인 삶이다. 여기서 "왜 사람은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흔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도출됐다고 볼 수 있다. 이론적인 견지에서,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의적인 개념은 아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도덕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선'이라는 데 동의한다고 해도, 그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는 아마 영원한 논쟁거리일 것이다. 여기서 그 유구한 역사를 다루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하니, 서둘러 공리주의적 행복이 무엇이며, 거기서 도출되는 핵심적인 주장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 공리주의적 행복과 그것의 평가 기준: 쾌락과 고통의 총량 / 쾌고 감수 능력
공리주의에서 정의하는 행복은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주 간과되는 점은 쾌락의 극대화와 고통의 최소화가 and의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공리주의를 단순히 "쾌락, 만세!" 정도로 요약하는 논변은 모두 부당한 처사이다. 엄밀한 수준에서 생각해보면, 이 두 가지 원칙을 동시에 고려하는 건 실질적으로 모든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유의미한 잣대를 가지는 것과 같다.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회란 상술한 행복의 정의가 사회 구성원 전체에 적용된 사회다. 즉, 쾌락과 고통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 '쾌고 감수 능력'을 가진 모든 인간들의 '이익'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지할 점은 쾌락과 고통이라는 기준의 범주가 성행위나 물리적 부상과 같은 말초적인 단계에서의 그것들 정도로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효용(이익)을 고려한다'는 표현이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공리주의는 사회 전체의 효용을 높이고, 고통의 총량을 낮추는 걸 목표로 한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참가자들에게도 인생 역전의 기회를 보장할 수 있는 '콜로세움'을 부활시키는 것은 바람직한가? 효용을 고려한다는 말의 의미를 근시안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공리주의를 비판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맥락이다. 요컨대 어떤 행위나 선택이 다소 품위가 떨어지거나 야만적이라고 해도, 그 사회 구성원들이 즐길 수 있다면 도덕적으로 허용되어야 하냐는 것이다. 공리주의가 고려하고자 하는 '행복'의 시간적 범위가 모호하다고 볼 순 있겠지만, 상기한 종류의 비판은 다소 유치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직관적으로, 그 같은 비인간적인 처사를 다루는 행사가 국가적으로 공인될 시, 장기적으로 사람들의 야만적인 성향이 강화되고 사회 전체가 퇴보된 문명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추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느낄 말초적인 쾌감, 짜릿함 같은 건 순간적으로 극대화될지 몰라도, 야만화가 진행되는 사회에서 그들이 일상적으로 느낄 고통 또한 배가될 것이다. 공리주의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대부분의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는 길이다.
정리하면, 공리주의는 자신의 정의에 따라 규정된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 도덕적인 사회이며, 그것은 그 사회 구성원 전체의 '쾌고 감수 능력'이 얼마나 적합하게 고려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사회 전체의 효용이 높아지는 길이 결과적으로 나 자신의 효용을 높이는 길이며, 도덕적인 삶이 지향해야 할 길이다. 이 지점에서 피터 싱어(Peter Albert David Singer)를 비롯한 몇몇 현대 공리주의자들에 의해, 도덕적 고려의 기준인 '쾌고 감수 능력'이 '동물의 이익도 인간과 평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동물 해방론의 핵심적인 근거로 부상하게 된다.
│ 동물 역시 쾌고 감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만약 인간이 '쾌고 감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쾌락과 고통, 즉 이익에 대한 고려가 가능하고, 또 그것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평등하게 고려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면, '쾌고 감수 능력'을 지닌 인간 이외의 종의 이익도 고려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을까? 설령 동물이 인간과 '똑같은 범주의 고통'을 느끼진 않을지라도, 대부분의 동물이 나름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들 역시 신경 계통을 가지고 있고, 외부의 자극을 해석하는 생물학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결론을 종합하여 정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공리주의자가 주장하는 도덕적 행위의 기준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동물의 이익 또한 고려해야 한다. 많은 종의 동물 역시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현대 사회에서 육류의 공급 방식이 '공장식 가축 사육'을 채택하는 데서 기인한 문제의식이다. 우리가 즐겨 소비하는 소, 닭, 돼지 등의 가축들은 자신의 손발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좁은 우리에 가둬져 성장을 강제로 촉진시키는 온갖 약물을 투여받고, 유전자 조작이 이뤄진 사료를 조달받는다. 그들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은 단지 '인간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도출되는 판단이 아니다. 육질을 연하게 만들기 위해 송아지 개체에 스트레스를 가하고, 신경 자극에 대한 고려가 배재된 채 오로지 극단적 경제적 효율성만이 추구되는 사육 환경이 그들에게 적지 않은 고통을 야기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직관적으로 소, 돼지 같은 동물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당연시하면서도, 그들을 과도하게 소비하고 학대하는가?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동물의 죽고 사는 문제보다 인간의 미식적인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종족 이기주의' 때문이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인종 차별과 비슷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단지 피부색에 따라 자행되는 차별을 생물학적 종이라는 기준으로 바꿔서 적용시키고 있을 뿐이다. 둘 다 생물이 태생부터 가지게 된 불가항력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육식을 즐기는 종족 이기주의자들은 동물의 이익이 얼마나 심대하게 침해당하든 간에, 인간의 사소한 이익(미식)을 충족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 같은 공장식 가축 사육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이라고 동물 해방론자들은 주장한다. 영양 균형의 문제라면 적절한 육류 섭취, 즉 그것의 소비를 줄이는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혹은 전면적인 채식이나 합성된 영양소를 섭취함으로써 부족분을 보충할 수도 있다. 하다못해 공산식 축산을 철폐하고 생태적 방식을 통한 방목 사육을 통해 고통 없이 그들을 가공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고기의 공급 규모가 지금과 같은 수준까지 이뤄질 수 없겠지만, 적어도 가축이 느끼는 고통을 최소화하는 윤리적 소비를 지향할 수 있을 것이다.
피터 싱어는 보다 엄격한 의미에서 전면적으로 채식주의를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설령 그게 현실적으로 힘들더라도 우리에게 가능한 대안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채식주의'라는 일종의 사회 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리라. 공리주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족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도덕적 외연의 범주를 동물에게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성에서 여성까지, 백인에서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으로까지, 역사적으로 권리의 외연이 확장되는 것은 도덕적 진보를 의미했다. 공리주의자는 이제 그 외연을 인간 이외의 종에까지 함으로써 인류가 한층 더 진보된 도덕관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 도덕적 주체와 객체의 차이
이에 동물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근거로 하여, 인간이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동물 종 또한 도덕적으로 대우하는 것은 부당하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즉, 인간은 쾌고 감수 능력뿐만 아니라 '이성'을 가지고 있어서, 도덕적인 약속이나 사회적 규범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기에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소, 닭, 돼지가 도덕을 이해하고 그러한 종류의 규범적 행위가 가능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신의 행위에 책임질 수 없는 짐승들을 도덕적으로 대우해야 하는가? 이러한 반론에 대한 동물 해방론자들의 의견을 소개하는 걸 끝으로 이 절의 내용을 마치고자 한다.
동물 해방론자는 이에 도덕적 책임을 떠안은 '주체'와 도덕적 수행 능력은 없지만 여전히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도덕적 쟁점을 발생시키는 '객체'를 구분한다. 예컨대 아기나 중증 정신질환자, 뇌사 상태에 빠진 환자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 사회는 실제로 일반적인 성인에 비해 판단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사실상 책임 소재를 물을 수 없을 정도로 주체적 행위가 불가능한 부류의 사람들 역시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정상적인 판단이나 행동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지체 장애인을 놀리고 모욕하는 건 누구나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 하물며 그들을 학대하거나 감금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리를 다른 동물에게까지 적용시키면 안 되는 이유가 뭘까? 동물 해방론자는 그런 건 없다고 말한다. 도덕적 행위 주체가 될 수 없는 존재 역시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인간 행위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기준이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개체의 쾌락과 고통의 총량이라면, 도덕적 주체는 아니지만 역시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다른 종의 동물 또한 도덕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에 따르면 공장식 가축 사육을 비롯해 동물의 고통을 현저히 야기하는 모든 종류의 학대와 축산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으며, 그것을 방치하고 육식을 즐기는 모든 사회적 행태 역시 부당하다. 우리는 인간의 이익을 고려하는 만큼이나 동물들의 이익도 평등하게 고려해야 한다.
2. 인간 공동체의 문제: 환경 파괴, 식량 조달
첫 번째 근거가 도덕 이론에서 비롯된 원리적인 내용을 토대로 동물의 권리를 확장적으로 주장한 것이라면, 두 번째 근거는 과도한 육식이 '동물의 권리'에 대한 논의를 차치하고서라도 '실제 인간 사회'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환경 파괴'와 '사료로 소비되는 곡물의 낭비'에 관한 주장이다. 이와 관련된 논거를 구체적인 수치는 생략하고, 핵심적인 내용만 살펴보도록 하자.
│ 환경 파괴: 사막화와 메탄가스로 인한 지구 온난화
예컨대 매년 전 세계적으로 무수히 많은 소, 닭, 돼지가 소비되고 있다. 이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수의 가축을 먹여 살리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양의 곡물(특히 옥수수)이 필요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 많은 양의 곡물 또한 구름에서 비처럼 내리는 게 아니다. 그들을 생산해낼 거대한 땅덩어리를 필요로 한다. 현재 인류는 무수히 많은 가축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곡물을 생산하고자 드넓은 지대를 경작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식의 토지 이용이 사막화를 가속화한다는 것이다. 농사에 이용될 지대를 확보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숲을 밀어버리고, 산을 깎아내어 땅을 고르게 만들고, 거기에 온갖 종류의 비료와 화학 성분을 들이부어 농경지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온실 가스를 흡수하는 식물들은 제거되고, 산업용으로 재배되는 곡물이 지구의 빈 땅을 뒤덮고 있다. 그로 인해 농경지의 주변 자연환경은 황폐화되고, 그에 따라 사막화가 가속된다.
이렇게 먹여 살린 가축들이 뿜어내는 메탄가스도 문제다. 특히 소, 돼지 같은 가축들이 방귀 등으로 뿜어내는 온실 가스는 대기의 온도를 높이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공기 중에 많아진 메탄가스는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 에너지가 바깥으로 방출되지 않도록 막고, 그것을 흡수한다. 그런 식으로 지구의 대기가 '달궈지는 것'이다. 매년 지구의 평균 기온이 상승하여 빙하가 녹고 있다는 보도는 이제 식상하게 들릴 정도다. 사람들은 거시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자신과는 무관한 일인 것처럼 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적 문제가 겨우 '고기를 먹고 싶다'는 사람들의 미식적 욕구 때문에 가속화되고 있다면, 만연해 있는 육식 문화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이 채식주의자가 주장하는 바다.
│ 곡물 낭비: 가축의 사료와 죽어가는 아이들
가축의 사료로 이용되기 위해 생산되는 곡물의 양이 천문학적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 특히 아이들이 굶주리고 죽어가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세계의 기괴한 모순을 시사하는 듯하다. 어떤 채식주의자들은 설령 당신의 미식에 대한 욕망이 동물의 생사의 문제보다 우선시 될 수 있다고 치더라도, 자신이 원치 않았음에도 이 세상에 태어나 배를 주리며 죽어가는 아이들의 생명보다는 어떤 경우에도 우선시 되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만약 사람들이 육식을 근절하거나, 하다못해 그 양을 줄여서 보존되는 곡물을 원조하거나 싼 값에 공급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잔존해 있는 대부분의 기아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다. 물론 가축 사육에 이용되는 곡물의 양이 보존된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타국이나 난민, 기아들에게 원조해야 할 의무로까지 이어질 순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고기의 공급에 이용되는 곡물이 보존될 시, 중대한 문제의 해결에 관한 현실적인 실마리가 제공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당신이 고기를 좀 덜 먹는다고 죽어야 했을 누군가가 살 수 있다면, 육식을 고집할 중차대한 이유가 남아 있는지 채식주의자는 묻는다.
이렇게 우리는 "왜 누군가는 채식주의를 열렬히 옹호할까?" 하는 문제에 대한 대략적인 대답을 도출해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육식은 마땅히 고려되어야 할 동물들의 이익을 심대하게 침해하기 때문이고,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자 세계 식량 문제에 대해 방관하는 식문화이기 때문에 근절되거나 제한되어야 한다. 물론 모든 채식주의자가 이러한 이유에서 채식을 옹호하는 것은 아닐뿐더러, 상기한 이유에서 육식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세세하게 입장이 갈릴 수 있다는 점은 인지해야 한다.
* 본 글은 학술적인 차원에서 주제를 설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기에, 문제 인식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나 실태, 참고 논문명 등을 따로 기재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