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선생 Nov 22. 2023

자퇴 각서는 왜 쓰나요?

[자퇴생 혼공 르포르 타주 6화]

딸이 자퇴를 한다고 했을때 난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해서 자퇴를 결정하는 이유에 대해 전달하고 딸이 원하는 대로 처리해달라고 했다. 혹시 담임 선생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다른 이야기를 해주실 말이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지만 담임은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 이후에 딸은 담임과 간단하게 상담을 했다고 했다. 담임은 딸에게 우리가 이미 예상했던 걱정들을 이야기했던 모양이다.


" 지금 모의고사 성적이 잘 나오지만 이게 고3때까지 유지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수능시험을 봐서 정시로 가는 아이들은 매우 적다. 자퇴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앞으로 내신성적을 더 올려서 수시로 가는 방법에 대해 더 고민해봐야 한다. 수시는 6개의 원서를 쓸 수 있는데 그걸 다 포기해야하는 거라 선택지가 좁아진다"


딸은 이미 가족과 충분히 여러가지 상황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기때문에 담임의 말에 결정이 바뀌지는 않았다. 오히려 딸은 자퇴하는 자신보다는 담임을 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엄마, 우리 반에 나 말고 2학기에 자퇴를 하는 아이가 하나 더 있어. 그 애는 재입학해서 나보다 한살 더 많은데 학교 적응 못하고 그만둔대"

"그렇구나. 근데 왜 담임이 걱정되는거야?"

"갑자기 자기 반에서 2명이나 학교를 그만두면 선생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것 같아"

"음....우리 딸 기특하네. 선생님 입장에서도 생각할 줄도 알고...선생님이 좋으신 분이셨나보네. 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거 보면..."

"엄마 그래서 말인데, 선생님한테 뭘 드리면 김영란법에 걸려?"

"글쎄, 자퇴하는 마당에 뭘 드리던 그게 뇌물은 아닐테니까...뭘 드리고 싶어?"

"응, 그냥 간단히 인사말은 하고 싶어서"

" 그래 좋은 생각이야"


난 딸의 말을 듣고 딸이 기특하면서 한편으로 학교가 원망스러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딸과 다르게 학교는 딸에게 자퇴서류 3부를 보내왔는데 그 중에 석연찮은 서류가 끼어있었다. 그것은 바로 '각서'다. 난 께름칙한 생각이 들어서 그 각서가 공식문서인지를 확인했다. 우선 인터넷을 찾아보니 어디에서도 자퇴할때 자퇴 신청서와 함께 각서를 따로 받는 경우가 없었다. 그래서 교육청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것이 공식 문서가 아님을 확인했다. 학교에서 자의적으로 받는 별도의 문서였다. 난 마지막까지 '예민한 민원인'이어야 했다.


학교 교무실로 전화를 했고, 담당자는 그 서류는 학교에서 당연하게 받는 거라고 설명했다. 나는 왜 그 서류가 당연하게 받는 서류냐고 물었다. 자퇴 신청서가 있고, 내용이 거의 같은데 왜 별도로 각서를 받는지 자세한 설명을 요청했다. 담당자는 내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고, 결국 교감을 바꾸어주었다. 교감에게 다시 같은 질문을 했고 담당자와 같은 대답을 할뿐이다. 그리고 단호하게 이제껏 그래왔다고 했다. 나는 교육청에 확인한 바 '각서'는 공식 서류가 아님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학교는 자퇴 공식 문서도 아닌 것을 별도로 만들어 받고 있는지 궁금하니 답변을 달라고 말했다. 교감의 목소리는 사무적인 것을 넘어서 냉냉해지기 시작하더니 "확인하고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늦은 오후에 교감이 아닌 담임 선생님께 문자가 왔다. 각서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다시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서 그럼 쓰지도 않는 각서를 왜 쓰게 했냐고 물었다. 담임선생님은 사고를 치고 학교를 그만두는 퇴학생들도 있어서 그런걸 받고 있다고 설명했고, 앞으로 딸과 같은 사유로 자퇴를 할 경우에는 각서를 따로 받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학교와 교사들은 아이에게 굉장히 사무적이었다. 예민한 학부모가 뭔 항의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듯 보였다. 학교와 교사는 민원에 매우 민감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정 또한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정말 상상하기도 힘들만큼 다양한 아이들 1000명이 다니는 학교이니 하루하루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다행인 일상일 것이다. 그리고 지난 여름 '초등 교사 자살 사건'으로 악성 민원 학부모에 대한 비난과 더불어 교사들의 처우와 보호의 목소리가 커졌다. 공교롭게 그 시기와 딸의 자퇴 시기가 맞물려 있어서 내가 혹시나 그런 악성민원인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고 두려웠다.


하지만 딸 아이의 기말 국어 시험 처리 과정과 자퇴 서류에 끼어 있었던 '각서'를 본 순간 너무하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한 의문제기와 질문 마저도 학교와 교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방어적이기만 다. 정해진 답은 그들에게 있고 그 답을 내가 거절하면 경계하고 절차와 형식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고집스럽게 자신들의 방식이 잘못될 수도 있음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았다. 그런 학교와 교사들과는 달리 딸은 학교를 그만두면서 담임 선생님의 '마음'을 걱정했다. 갈등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담임의 마음을 살필 줄 아는 딸이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


딸은 자퇴후에  그때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왜 그렇게 학교와 선생님들에게 항의했는지는 알겠는데, 난...사실 조금 불편했어."

"그랬구나. 네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었겠네..그때는 엄마가 시험출제오류 자체보다도 이 문제를 처리하는 학교의 대응방식에 더 화가 났던거고. 누군가는 시험출제 오류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 매년 일어나는 일이니까. 넌 그때 괜찮다고 하더니 진짜 괜찮은건 아니었구나...엄마가 심했나?"

"아냐, 엄마같은 사람도 있어야 선생님들이 오류없도록 시험출제할때 더 신중하게 내시겠지"

딸이 그린 학교 이미지




그렇다. 난 학교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다. 사실 학교에 큰 의미를 두기 때문에 불만이 많다. 학교라는 공간은 아이들에게 집 이외에 절대적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고등학생쯤 되면 집에 있는 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게 된다. 집은 잠자는 공간이 되고 대부분은 학교에서 보내게 되는데 학교라는 공간은 이쯤되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기숙학교를 가는 아이들 경우에는 이미 부로로부터 독립된 상태로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학교가 아이들의 성장과 독립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한숨만 나온다. 실제로 학교를 다니는 의미를 교사들조차도 '수업을 통한 아이들 성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자부심있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실제로 한국의 고등학교는 '비효율적인 입시학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들 학교라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친구들'에게 가장 큰 의미를 두는 것이다.


나의 이런 비판적인 목소리에 대체로 공감을 하면서도 하는 소리들은 다들 뻔하다. 가장 많은 것은 체념적인 목소리다. 현실이 그런데 우리가 어쩌냐는 것이고. 완벽한 현실주의자들은 그런 것 신경쓰지 말고 각자 잘 알아서 하면 된다는 식이다. 어느 쪽이든 결론은 늘 이렇다. 그런 소리해봤자 변하는 것은 없고 투덜대봤자 내 아이만 손해니 그냥 내 돈 들여 좋은 사교육 시켜 최대한 높은 사다리에 올려 놓으면 그뿐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게 정상일까? 언젠가 내가 가르치는 중등 아이들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너희는 학교 가는 게 즐겁니?"


아이들의 대답은 대체로 그렇다고 긍정했다.


"그럼 학교 가는 게 즐거운 이유는 뭐야?"


아이들은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황당한 대답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략 대답들이 그렇다.


"쉬는 시간이 있어서 좋아요"

"친구들이 있어서 좋아요"

"급식이 맛있어요"

"그냥 집에 있는 것보다 좋아요"

"방학이 있어서 좋아요"


나는 아이들의 대답을 듣고 이 질문을 던졌고, 그 이후 그 질문에 대답하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얘들아~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그리고 학교 선생님 수업이 의미있고 너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왜 아무도 없지?"

"학교의 대부분 시간은 수업 아니니??"


"..."

"...."

"..."

"..."

"..."

"...."

"..."


아이들의 표정에는 불행의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그냥 진실따윈 모른 채 행복한 바보로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거짓을 행복이라 믿으면서. 남들도 다 그렇다고 믿으면서. 이 나라에서는 그저 문제만 안생기면 장땡이니까. 자퇴하는 아이의 앞날에 대한 걱정은 형식적일뿐 그저 학교와 교사들의 안위가 최우선이 될만큼 무엇이 그토록 두려운 것일까. 학교를 나가는 아이에게 의미를 알 수 없는 각서 대신에 응원의 말을 해줄 수는 진정 없었을까?


결국 쓰지 않은 각서


매거진의 이전글 그래, 이 따위 학교 다니지 말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