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주야장천 이야기 책만 읽힌다. 그러다 보면 왜 지식 독서를 시키지 않느냐고 물어온다. 책을 읽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정보를 습득하는 것인데, 그러니 역사책도 읽고 과학 책도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지식이란 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면 잘 저장되지도 않을 뿐 더러 , 어렵게 저장했더라도 자주 꺼내서 쓰지 않으면 다 잊게 되어있다.
나 역시 다양한 종류의 책을 읽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너무도 잘 안다. 나도 내 아이가 이야기 책뿐 아니라, 역사와 과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으면 하지만 어디까지나 바람이라 거기서 끝낸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과학책, 역사책, 철학책들을 사서 잘 보이는데 꽂아두기도 한다. 하지만 읽으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나도 책 수업을 막 시작했을 때는 아이들이 지식책을 많이 읽어 배경지식도 늘리고 똑똑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역사책을 같이 읽은 적이 있다. 아무리 쉽게 나온 역사책이라도 아이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어휘들이 많아 열심히 설명을 해주면서 차근차근 선사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를 읽었다. 역사책과 더불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연결해서 읽고,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도 같이 읽었다. 그래야 아이들이 더 오래 기억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나의 기대는 착각이었다. 아이들과 그토록 열심히 읽었고, 심지어 읽을 당시에는 설명이 덧붙여져서 재밌어했던 아이들은 나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망각의 곡선을 따라 빠르게 내용을 잊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면 시대순을 헷갈리는 것은 기본이고, 그런 내용이 있었냐는 듯 빤히 쳐다보기 일쑤였다. 순서가 뒤죽박죽인 채 간신히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나 인물 정도만 기억에 남을 뿐.
우리 뇌는 단기 기억의 경우에는 20분만 지나도 사라진다. 또한 잘 기억하리라 마음먹었던 내용도 1시간이 지나면 44%가 사라지고, 1일이 지나면 33,7%, 1달이 지나면 약 21%만 남는다고 한다. 애초에 우리 뇌의 기억력은 매우 부실하다.
또한 우리 뇌는 평소 사용하던 어휘들을 대뇌 피질에 저장하는데, 신기하게도 단어를 머릿속에 저장할 때 유사한 개념의 단어들을 서로 가까운 영역에 저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별로 상관없는 개념들의 단어들은 멀리 떨어져 저장해 놓는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글을 읽을 때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아무리 길이가 길어도 '누구랑 누가 살았는데, 어느 날~' 이렇게 시작만 하면 신기하게 뒷 이야기들이 자동으로 생각나는 것이다. 유사한 개념의 단어들도 가까운 영역에 저장하는데, 이야기는 애초에 한 묶음으로 저장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를 꺼내면 줄줄이 딸려 올라오는 고구마 줄기 같이 다 생각나는 것이다.
또한 이야기 책은 주인공이 있다. 아이들이 책을 읽는 것 같지만 실은 이 매력적인 주인공이 아이를 이야기 끝까지 읽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주인공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그 주인공과 하나가 되는 순간 책의 두께는 더 이상 문제거리가 아니다. 주인공과 하나가 되어 그를 응원하며 그 세계에 몰입하게 된다.
반면 지식책은 주인공이 없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끄는 주인공이 없으니 아이가 아주 능동적으로 읽어내야 한다. 게다가 수많은 개념어가 등장하는 과학책, 지금은 쓰지도 않는 어휘들이 가득한 역사책의 허들을 넘으며 오로지 지식 습득을 위하여 열심히 책을 읽는 아이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학습만화가 등장한 것이다. 인기 있는 학습만화를 보면 엉뚱하거나 유머스러운 아이들이 등장하며 어려운 내용들을 최대한 쉽게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WHY책이 그렇게 많이 팔린 것이다. WHY책은 아이가 똑똑해지길 원하는 부모와 어떻게든 책을 팔아야 하는 출판사가 아이들을 꼬시기 위해 만들어진 성공적인 상품이다.
이런 경험을 3-4년을 반복적으로 한 뒤로 난 지식책을 내 주도적으로 아이들에게 읽히는 행위를 멈추었다. 다만 드물게 지식독서에 흥미를 보이는 아이들에게만 추천한다. 사실 이런 아이들은 거의 없지만 간혹 읽어보겠다고 가져가더라도 읽지 못하고 반납하는 경우가 거의 전부지만.
이렇게 아이들이 지식책을 읽고 빠르게 내용을 잊는 이유는 뇌의 기억과 망각 원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지식책에 담긴 내용들이 어렵고 아이들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이들은 똑똑해지는 것에 딱히 관심도 없다. 일시적으로 호기심이 생겨 읽고 저장했다 하더라도 주기적으로 꺼내어 쓰거나 외우지 않는다면 애써 읽은 지식책의 내용들은 모두 사라진다.
즉, 나의 관심사가 아니면 읽더라도 더 빠르게 휘발된다.
그래서 역사책이든, 과학책이든 읽히고 싶다면 꼭 아이의 관심사에 한정하여 읽기를 권한다. 두루두루 읽어 풍부한 배경지식과 상식을 갖추길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이다. 그나마 관심을 갖고 집중해서 읽어야 지식책을 읽은 보람이 있다.
그러니 그 시간에 읽고 싶은 이야기 책을 찾아 읽는 것이 낫다. 때때로 밤을 새워서 읽은 책은 오래 기억하고 시간이 지나서 내용은 희미해지더라도 그 설레는 흥분된 경험은 평생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다음 책을 읽고, 그런 기억들이 하나 둘 쌓여야 비로소 책 읽는 어른으로 성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