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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Mar 06. 2024

20편.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네

[20화]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어제 자욱했던 안개가 걷히고 길을 나서는

오늘 아침 풍경은 유난히 청명하고 깨끗하다.

도보순례의 가장 큰 매력은 하루도

같은 길을 걷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 다른 풍경, 다른 즐거움을 맛본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매일 다른 어려움에 봉착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날은 종일 비가 오기도, 어떤 날은 무풍의 뙤약볕을 견뎌야 하기도, 긴장 속에 탁탁 스틱소리를 내며 수풀 속 킁킁대는 멧돼지를 쫓아 보내느라 진땀을 뺀 날도 있었다.       

Angles에서 Boissezon으로 가는 오늘의 난제는

밀밭 위 파리떼 습격이다. 작은 초파리가 아니라 검고 큰 파리였다. 그런데 개체수는 초파리를 능가했다. 소리는 또 얼마나 요란한지. 어머나! 너희 오늘 무슨 집회라도 있는 거니? 날 물거나 해치는 곤충들도 아닌데 어쩐지 달갑지 않다. 이유 없이 미워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양손에 든 스틱을 휘저으며 연신 우릴 향해 달려오는 파리떼를 쫓아보지만 역부족이다.

그래, 이럴 땐 싸우려 덤비는 것보다 피하는 게 상책이다. 약 1km를 돌림노래하듯 ‘아! 으악! 엄마야!’를 외치며 줄행랑을 치던 우리 셋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 피식 웃음이 난다.    

미션을 완수하고 나니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길 끝에 우리가 묵을 보라색 지트(gite)가 눈에 들어왔다. 마리엘라에게 보라색을 좋아하냐고 묻고 있는데, 노년의 프랑스 부부가 “봉쥬르~” 인사를 건네온다. 며칠 째 계속 같은 숙소에서 만났던 분들이다.


인사를 나누고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1층은 널찍한 공용 부엌에 여러 순례객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식탁이 놓여있었다. 오~ 식기세척기까지! 방이 여러 개 있어 오늘은 각자 큰 방을 혼자 쓴단다. 게다가 창 밖 뷰까지 근사하다. 그런데도 숙박비는 단돈 18유로라니.

이 정도면 진정한 5성급이라며 우리 셋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찬물을 끼얹는 절망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글쎄 마을의 빵집도 슈퍼마켓도 문을 다 닫았단다. 아.. 남프랑스. 평일 오후 3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문을 닫았다고? 사실 오늘은 초겨울처럼 다소 쌀쌀해서 따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날씨였다.


그래서 오늘은 따끈한 음식을 만들어 먹자며

기대에 부풀어 있던 우리였기에

문을 닫았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뒤 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글쎄 가게 주인이 딱한 5명의 순례객을 위해 잠시 문을 열어주신단다. 에잉? 이런 게 또 남프랑스 산골 인심인가? 암튼 우리로선 감사한 일이었다. 가게 문을 열어준다는 것이 이렇게나 기쁜 소식인 줄 미처 몰랐다.      


반가운 마음으로 한달음에 식자재 구멍가게로 가 이것저것 식재료를 많이 골라 담았다. 사실 순례객이 물건을 많이 사는 건 드문 일이다. 쇼핑한 물건은 곧장 배낭의 무게로 이어지기 때문에 하루 치면 족했다. 하지만 마음을 써준 주인장의 마음에 우리도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던 것이다.


기분이다! 풍족한 식자재로 따끈한 음식을 만들어 숙소에 계신 다른  분과 함께 나눠 먹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슈퍼마켓 주인장의 넉넉한 마음을 전해받은 우리의 마음도 넉넉해졌다.      

저녁 끼니를 해결할 재료를 손에 넣었으니, 순례자의 다음 루틴을 진행할 차례. 우린 스탬프도 찍을 겸 마을 꼭대기에 있는 성당을 구경하러 갔다.


숙소의 보라색 문이 말해주고 있듯 Boissezon 마을 곳곳에선 예술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예술의 혼이 살아 있는 아기자기한 마을과 이곳을 감싸고 있는 자연이 어우러진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오늘도 무사히 걷기를 끝냈다는 안도감과 행복감이 밀려왔다.     

숙소로 돌아온 조안나와 마리엘라가 오늘 실력 발휘를 좀 해보겠단다. 아까 산 양파, 파프리카, 감자, 서양 애호박, 통조림 콩을 넣고 분히 푹 끓여 김이 폴폴 나는 따끈한 요리를 완성했다. 거기에 단호박스프와 와인까지 차려 놓으니 너무나 근사한 저녁 식탁이 완성되었다.


못 먹을 뻔한 저녁을 먹게 되어서였을까?

기대를 안고 뜬 첫 숟가락의 맛은 미슐랭 맛집 저리 가라였다.

프랑스산 와인과 따끈한 프의 부드러움은 롤러코스터 같은 하루의 고단함을 스르르 녹여주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보다 그 일상이 깨진 특별한 순간을 더 잘 기억하는 것 같다. 특히 감정적으로 충전된 사건은 중립적인 사건보다 더 잘 기억된다고 한다. 그러니 평소와 다른 특별한 감정을 느낀 그날을 나의 뇌는 쉽게 놓지 못하나 보다.

오랜만에 홀로 묵게 된 방에서 조용히 야경을 바라보며 낭만에 젖어들던 그날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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