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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Feb 28. 2024

19편. 연둣빛 숲이 건네온 편지

[19화]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누군가 내게 4월이 무슨 빛깔이냐고 묻는다면

고민 없이 ‘연둣빛’이라고 외칠 것이다.


오늘은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끝에 틔워냈다고 하기엔 너무도 여리여리하고 보드라운 어린잎들의 향연이 펼쳐진 숲길이다.

얼핏 한 몸체에서 일어난 일이 맞냐고 반문하고 싶을 만큼 간극이 커 보이지만, 잠시 내 지나온 시간을 곱씹어 보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자연스런 이치다.      

평온했던 삶에 뛰어든 한 남학생이 만들어낸 쓰나미에 밀려 억울함을 목놓아 외치며 이곳까지 온 나였다.

순례 초반 세차게 퍼붓는 빗속을 걸으며

계속 순례를 할 수 있을지 막막했던 시간을 지나,

이제 담담히 길 위에 서 있는 나만 봐도 그렇다.


어머니의 진통과 산고 없이

순결하고 사랑스러운 아기가 세상에 나왔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부드럽고 온유한 연둣빛은

시련과 고통이 지나간 마지막 자리에

여운처럼 남겨진 색인지도 모르겠다.


한없이 요동치고 널을 뛰던 마음이 사그라든 뒤

찾아온 고요함 속에 불어넣어진 새 숨결의 빛깔인지도.     

마침 오늘 걷는 길은 험한 산도 관광지도 아닌, 약간의 습지를 품은 아늑한 숲길이다. 생명이 움트는 숲의 한복판에서 고운 연둣빛 기운을 눈에 담으며 산뜻하고 가벼운 발걸음을 이어갔다. 그것으로 충분히 감사했다.

그런데 오늘 숲이 매력 발산을 제대로 해보기로 작정한 것 같다.      

“내가 외면만 아름다운 게 아니고,
           내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줄 아세요?”     


누가 이런 멋진 생각을 했을까? 눈앞에 뜻밖의 장면이 펼쳐졌다. 하얀 손글씨가 적힌 회색 석판이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지친 순례자에게 잠시 쉼을 주고 싶었던 걸까.

아님 속세를 훌쩍 떠나온 순례객의 내적 고단함을 위로해주고 싶었던 걸까. 어떤 순례객이 돌에 자신이 좋아하는 문구를 새겨두고 떠난 것이 그 시작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숲을 지키는 전령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비밀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었던 걸까.      


발신인이 불분명한 메시지 앞에 잠시

정답 없는 생각의 실타래를 마음껏 풀어헤쳐 본다.     

그런데 팻말이 하나가 아니었다. 누군가 숨겨 놓은 메시지들이 숲 속 곳곳에서 툭툭 계속 말을 건네 왔다. 근데 어쩌지? 난감하다. 나도 답을 해주고 싶은데 모조리 프랑스어다. 난 불어 까막눈.


당장은 어려웠지만, 어렵게 말을 건네온 누군가와의 소통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보물찾기 하듯 메시지 석판이 나올 때마다 일단 카메라에 담았다.


정확한 의미를 당장 알 수는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분명 순례자에게 새로운 숨을 불어넣어 줄,  

그들을 살릴 연둣빛깔 메시지라는 걸.      

누가 쓴 건지도 모를 우연히 마주한 메시지가

내 맘에 와 콕 박힐 때,

우연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닌 것이 된다.

불특정 다수가 아닌,

나를 위해 준비된 운명 같은 언어가 된다.

의도하지 않았기에 더욱 신비로운 만남이 된다.  

어반 스케치 by 김명숙

사실 일주일 전 여섯 개의 메시지 중 유독 마음이 가는 문구가 하나 있었다. 그래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자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어쩐지 나의 시선은 다른 글귀에 더 오래 머무르고 있었다. 그래서 과감히 노선을 바꿔 현재 나의 감정선을 따르기로 했다.     

지난 월요일 늦잠을 자는 바람에 매일 가던 S성당 새벽미사를 못 갔다. 그래서 B성당 오전 미사를 가게 됐다. 거기서 무릎 꿇고 두 손을 맞잡은 채 기도하는 한 여인을 보게 됐다. 뒷모습에 숨길 수 없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얼핏 보니 실루엣이 익숙하다. 지인이었다. 성당 밖으로 나와 인사를 나누다 이야기 끝에 눈물을 보이고 마는 언니.      


그런 언니에게 난 새벽미사에 나와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분명 인간의 위로 이상의 평화를 주시는 분임을 알기에. 근데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단다. 그래서 언니를 위해 기꺼이 모닝엔젤이 되어주기로 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일어나 통화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니까.


그렇게 언니는 어제 새벽을 함께 열었다. 그리고 오늘 새벽 언니의 얼굴엔 어제와 그제 고여 있던 눈물 대신, 잔잔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언니는 내일도 오겠단다.   

[ 삶이 너에게 미소 짓지 않는다면,

  첫 발걸음을 내딛는 것부터 시작하라. ]   


머물러 있고 싶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용기 있게 첫걸음을 내디딘 언니가 멋져 보였다.

 첫 발걸음은 언니의 삶에 다시 미소를 찾아 주었다.


그래서 절망의 순간 신은 내 손을 끌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새로운 길을 걸어 나가며,

새로운 즐거움을 보여주고 싶으셨는지도.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곧 다가올 4월의 연둣빛 숲길을 미리 걸으며 눈길을 붙잡는 나만의 메시지에 잠시 머무실 수 있으면 좋겠다. 욕심인 줄 알지만 그 문구에 담겨 있을 각양각색 다채로운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얼마나 감사하고 따뜻한 순간일까. 

[ 은 나의 메시지 ] 


[당신이 이 길을 꿋꿋이 계속 걸어 나간다면,    우리는 당신을 따를 만큼 충분히 미쳐 있다.] 

   

[ 다른 사람의 기쁨 안에서 당신의 기쁨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행복의 비결이다. ]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행복은

우리가 나누어주는 행복에서 온다. ]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사랑은 당신이 보는 모든 곳에 있다.

가장 작은 모퉁이에서도...]  


Day 14 : La Salvetat-sur-Agout – Angles 22km (25/04/2018)


불어 번역을 도와주신

송지영선생님과 루멘 신부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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