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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Feb 21. 2024

18편. 그러니 맘껏 울어도 좋다.

[18화]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Murat 마을의 아침 풍경                        어반 스케치 by 김명숙

연예인을 실물로 봤을 때의 신기함 같기도, 흡사 동화 속 세상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컴퓨터 초기 바탕화면에서 자주 보던 이미지를 실물로 영접한 나의 소감이다. Gervais-sur-Mare에서 Murat 마을로 가는 길에 마주한 풍경이 내게 컴퓨터 바탕화면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하늘 아래 온통 초록 들판 위 

덩그러니 자리 잡은 집 한 채.     

바탕화면을 연상시킨 남프랑스 Murat으로 가는 길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교무실 컴퓨터 바탕화면 뒤로 날 기다리고 있는 건 빠른 처리를 기다리는 공문과 업무였다. 하지만 컴퓨터 밖 초록 들판의 다음 페이지는 평화로운 대지를 지키고 있는 말과 소, 양이 만들어 낸 목가적 풍경이었다.


이 길을 처음 대하는 순례객의 다소 호들갑스러운 눈빛을 그들은 큰 움직임 없이 그저 일상의 편안함으로 맞아 준다. 들떴던 마음이 덩달아 차분해진다.      

평온함은 낮까지 이어져 라우자스 호수(Lac du Laouzas)에 이르렀다. 호수의 우아한 빛깔과 구름이 함께 빚어낸 풍경은 우리의 발길을 붙잡았다.


조안나와 마리엘라와 함께 걸으면서 발견한 두 사람의 최고 장점 중 하나는 아름다움 앞에서 멈출 줄 아는 여유였다. 목적지까지 걸어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을 그냥 스쳐 지나치지 않았다.


멈추고, 머물고, 충분히 느꼈다.


이번에도 두 분은 뷰 스팟에 자리 잡고 눕는다.

순간을 마음에 담기 위해.

난 그런 그들의 모습까지 마음에 담아 본다.      

잔디에 앉아 호수의 풍경을 즐기는 조안나

다음 날 Agout로 향하는 이른 아침은 자욱한 안개로 휩싸여 있었다. 자연스레 나의 시선은 하늘이 아닌 아래로 가 있었다. 풀밭에 올라온 4월의 봄기운을 머금은 노란 민들레꽃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번에도 두 친구들은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배낭을 잠시 내려놓고 온몸으로 인사하는

조안나와 마리엘라를 나도 뒤따라 간다.

안개 낀 풀밭에 누워 순간을 눈에 담는 조안나와 마리엘라

쪼그려 앉아 가까이 들여다본다.

어머나!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

예쁘다!

감출 없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작은 탄성.


풀밭에 한아름 만개한 민들레꽃도 아름다웠지만,

풀잎에 맺힌 이슬도 비할 수 없이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 순간 이슬은 누군가의 애달픈 눈물방울 같았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그렇담 마음껏 울어도 되겠구나.
      그 모습도 저렇게 아름답다면.      


자욱한 안개와 이슬 맺힌 풀잎은 온몸으로

내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민들레 밭에 털썩 앉은 나

“빛나는 순간만 인생은 아니란다. 빛만 지속된다면 결국 사막을 만들 뿐. 밤은 사라지고 낮만 있는 하루를 상상할 수 없고 그림자 없는 우린 있을 수 없지. 비 오는 날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안개 낀 날도, 쏘옥 도려내어 버리고 싶은 아픈 시간도 네 인생의 귀한 순간이란다.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해 애쓰고 있는 너 자신을 꼬옥 안아 주렴.”     


작은 이슬방울 하나가

갑작스레 찾아온 나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역시 작은 것의 힘은 크다.     

그러다 문득 학창 시절부터 비 맞는 것을

참 좋아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비 오는 날 비에 내 몸과 옷이 젖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비를 느낀다는 그 말이 그래서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등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 감독을 하던 그날이 특별하게 기억됐나 보다. 한 남학생이 자습에 늦어 헐레벌떡 뛰어왔다. 평소 교칙을 잘 지키던 모범생이었다. 그래서 더 이유가 궁금했다. 아이는 비를 맞고 놀아 옷이 다 젖어 갈아입고 오느라 늦었단다.


약속시간과 자기 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한바탕 교사로서 잔소리를 하고 들여보냈다.

하지만 내 속 마음은 좀 달랐다.

“짜슥! 너 인생을 좀 즐길 줄 아는구나! 좀 멋진걸~” 비록 자습에 조금 늦긴 했지만 온몸으로 비를 즐기던 그 학생이 더 좋아졌던 기억이 생생했다.     

야간자율학습 감독 에피소드 기록 SNS

그날 자욱한 안개와 순응하는 자연이 나를 잠시

사색의 시간으로 초대해 주었던 것 같다.

자욱한 안개에 한 번 젖고,

추억과 감성에 한 번 더 젖은 내 안의 내게 당부했다.


한 존재가 성장하기 위해선

따스한 빛과 차가운 비 모두 필요함을 잊지 말기를.

그러니 비에 젖어 잠시 무거워진 발걸음에 속지 않기를. 내리는 빗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

비를 즐기던 너였음을 잊지 말기를.   

Day 11 : Joncels – Serviès 26.5km (22/04/2018)

Day 12 : Gervais-sur-Mare – Murat-sur-Vèbre 25km (23/04/2018)

Day 13 : Murat-sur-Vebre - La Salvetat-sur-Agout 26km (24/0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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