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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Feb 14. 2024

17편. 어깨가 무슨 죄람

[17화]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도보 순례를 시작한 지도 어언 일주일. 기적이 따로 있을까. 여기까지 걸어온 자체가 기적이다.


순례 시작 전 나의 가장 큰 걱정은 발바닥이었다. 족저근막염을 앓았던 터라 발바닥이 아프면

답이 없었다. 그냥 돌아가는 수밖에.


그래서 안전장치를 철저히 준비했다.

등산화 안쪽에 맞춤 깔창을 깔았다.

충격을 흡수해 준다는 발바닥 보호대도 착용했다. 그래서일까? 신기하게 발바닥은 잘 버텨 주었다.

아니, 시간이 갈수록 정상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문제는 어깨였다.  

    

사실 도보 순례자의 배낭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초소형 집이나 다름없었다.

한 마디로 천으로 만들어진 집을 지고

하루 5~6시간을 걷는 거다.


신발장(숙소에서 신을 슬리퍼, 우비, 스패츠 등), 옷장, 냉장고, 이불장(침낭), 욕실장(세면도구, 세탁용품), 책장(순례 가이드북, 일기장), 화장대(선크림,화장품), 약키트(베드버그킬러 스프레이, 각종 상비약, 한방 침까지..). 

이 모든 기능이 배낭 안에 응축되어 있었다.  

나의 배낭 속 물건들 총 집합

하지만 난 배낭을 지고 걸어본 경험이 전무했다.

평소 어깨가 감당했던 무게는 기껏해야 숄더백과 책 몇 권 정도가 다였다. 그러니 오후쯤 되면 배낭의 무게가 버거웠다. 자꾸만 배낭을 내려놓고 쉬고 싶었다.


사실 내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분명 책에서 읽었다. 순례길에서 너무 어깨가 아프면 다음 마을까지 가방만 미리 배달해 주는 동키(donkey) 서비스가 있다고. 그래서 배낭을 지는 게 너무 힘들면

무리하지 말고 당나귀에게 맡기자 생각했다.

[하하 실제는 포터가 돈을 받고 옮겨다 준다. 이름만 동키다.]     


그런데 와서 보니 웬걸.

그건 스페인에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순례자가 많지 않은 남프랑스에는 그런 서비스가 없었다.


이런 나의 딱한 어깨 사정을 조안나와 마리엘라에게 전했다. 육안으로 봐도 그들에 비해 내 배낭이 훨씬 무거워 보인단다. 나도 인정한다.

조안나와 마리엘라는 2주 조금 넘게 걷지만 난 2달 반을 걸어야 하니 그런 거라고 합리적 변명을 해 본다.


이유야 어떻든 계절이 바뀌면 집안 대청소를 하듯, 이쯤에서 대대적인 배낭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무엇보다 어깨가 그걸 간절히 원했다.     


마침 숙소에 체중계가 보인다. 가방을 올려보니 조안나 것은 8kg 정도, 내 건 10kg이 넘었다. 가장 적당한 무게는 체중의 10%라고 했다. 두 배 초과다.

어깨가 파업을 선언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을만했다.    

삼총사 배낭(왼쪽부터 마리엘라, 나, 조안나) 내 배낭(짐  넣기전)

짐을 반으로 줄이기 vs. 살을 찌우기.

뭐가 더 쉬울까?

둘 다 현실적으로 당장은 어렵다. 정신 차리자!


우선 가장 무게가 나가는 것부터 생각해 보자. 그렇지. 두꺼운 스페인 순례가이드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스페인까지 가려면 멀었으니 버릴 순 없었다. 일단, 필요 없는 파트만이라도 찢었다.

이미 지나온 프랑스여행 책은 과감히 뺐다.

집까지 데려가고 싶던 욕심도 조용히 내려놓는다.


액체류도 꽤 무겁지!

베드버그킬러 스프레이의 캡을 열어 반쯤 버렸다.

혹시라도 더 필요하면 나중에 약국에서 사기로 하고.     

가방을 비워내던 숙소 & 그날 동네 야경이 예뻐 찍은 사진

하나 둘 가방을 비우고 있는 날 지켜보던

조안나와 마리엘라가 거든다.


너무 무거우면 내려놓고 가면 되지요.

당신에게 지금 당장 불필요한 걸 여기 숙소에 놓고 가면

필요한 사람이 유용하게 잘 쓸 거예요.


그렇지. 이런 게 아름다운 순례 나눔이지.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내친김에 옷장 정리도 좀 해 볼까?

추위에 취약한 나는 다양한 방한 용품을 준비했다.

그런데 기온이 점차 올라가고 있었다.

아래위 방한 내의 유니*로 히트텍을 따로 뺐다.

또 이번에 새로 산 상의 하나와 등산 바지도

기부하기로 맘먹었다.


사실 빨래가 안 마를 때를 대비한 여벌의 옷들이었다. 그런데 대부분 숙소의 라디에이터 위에 올려놓으니

잘 말랐다. 또 건조기가 있는 곳도 많았다.

혹여나 미처 덜 말랐다면 다음 날 가방에 집게로 매달고 걷다 보면 어느새 뽀송뽀송 말라 있었다.

그러니 걸을 때 입을 바지도 하나면 될 것 같았다.


이제 덜어낼 수 있는 건 다 던 것 같다.

세탁 후 가지런히 개켜서 숙소 테이블 한편에 두었다.

필요한 주인에게 잘 쓰이라는 작별 인사와 함께.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새 주인이 참 빨리도 나타났다.

놀라지 마시라. 바로 나의 두 친구였다.


검소한 나의 이탈리아 맘 마리엘라는

유니*로 히트텍을 챙겼다.

내가 입던 내의라는 건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사이즈가 맞을까 갸우뚱했지만,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한편 조안나는 지퍼 달린 내 상의를 바로 입어 본다.

바지는 누가 봐도 사이즈가 맞지 않으니

제3의 주인을 기다려야 했다.      

내가 나눈 옷을 입고 기쁨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조안나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색상과 스타일, 기능이 모두 마음에 쏙 들어 구매해

두 번 밖에 안 입은 옷이었다.

내놓기 아까웠지만 어깨를 생각해 포기한 거였다.


괜히 버렸나?’ 하는 순간의 후회와 물욕이 밀려왔다. 참 인간적이다..나. 하지만 평정심을 되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조안나가 내 옷이 맘에 들었는지 한동안 계속 입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렇잖아도 두 사람에게 고마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어 정말 다행이다!’    

삼총사 신발(왼쪽부터 나, 마리엘라, 조안나)
어반 스케치 by 김명숙

그런데 배낭 속 물건을 정리하면서

끝내 내가 놓지 못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보게 됐다.


바로 건강을 우려한 비상약들과

안전에 관련된 물품들이었다.

앞으로 닥칠지 모를 만일의 상황을

어떻게든 통제하고 싶은 내가 보였고,

건강을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내가 보였다.

배낭을 가득 메운 상비약들

그 불안과 상황 통제 욕구가

고스란히 배낭의 무게로 이어졌다.

곧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이 되어 있었다.


육체적 고통의 원천인 줄만 알았던 배낭의 무게.

어쩌면 내게 내려놓아야 할 정신적 무게에 대해

말해 주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게 산티아고로 떠나라고 하신 그분께서

어디선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 무거운 짐은 다 내게 맡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사뿐히 걸어 나가렴."

어쩌면 산티아고 순례길은
나를 알아가고,
그분의 뜻을 알아가는
깨달음의 길인지도 모르겠다.

빵빵한 배낭의 무게 때문에 돌에 기댄 포즈를 취한 포도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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