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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Feb 07. 2024

16편. 유럽에 순례객 우대 무료 화장실이?

[16화]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유럽에 순례객 우대 무료 화장실이?


4월 말로 접어들며 기온이 성큼 올랐다.

날이 더워진 만큼 마실 물도 더 많이 필요했다.

마침 순례길 중간 마을에 식수를 공급받을 수 있는 수도가 있어 잠시 멈췄다.


조안나와 마리엘라가 물통에 물을 채우고 있는 동안

난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행동이 이탈리아 친구들

조안나와 마리엘라의 눈에는 다소 이상해 보였나 보다.    

“Valeria(세례명이자 영어이름)는 물 안 받아요?”

     

사실 수돗물을 받지 못해 가장 속상한 사람은 나였다. 물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 아실 거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배낭에 하루치 생수의 무게까지 더해져 갈수록 어깨 통증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순례 후기들의 공통된 조언이 있었다. 한국인들은 되도록 생수를 사서 마시라는 거였다. 유럽물에는 석회 성분이 많아 복통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게 그 이유. 이런  상황을 두 사람에게 설명해 줬다.  

   

그런데 우린 왜 아무렇지 않죠?”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리엘라가 의문을 제기했다. 나라도 그렇게 물었을 것 같다.

두 나라의 문화충돌 상황.

잘 이해시켜주고 싶기도, 잘 이해받고 싶기도 했다.

난 찬찬히 한국의 식수 문화를 알려줬다.     


어려서부터 이 물을 마셔온 유럽인들은 면역이 생겨 마셔도 큰 문제가 없다고 해요. 하지만 우린 그 물에 대한 적응력이 없기 때문에 장이 예민한 사람들은 탈이 날 수 있대요. 실제 한국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를 마신답니다.


정수기 물, 생수, 아니면 끓인 수돗물. 애석하게도 한국에선 그냥 수돗물을 마시는 사람은 거의 없답니다.      


다행히 긴 설명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여 준다.

휴~ 오해의 위기를 잘 넘긴 것 같다.

이젠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다음 날 마실 생수부터 사는 나를 좀 이해해 주려나?

더워진 날씨 탓에 물을 많이 들이켰더니

몸에서 수분 좀 빼달란다. 중간에 마을을 지나친다면, 성당이나 카페의 유료 화장실을 이용하면 된다.

하지만 오늘 루트는 험난한 산길이다.


“조안나, 저 화장실이... 마을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급해지는 마음을 조안나에게 털어놨다.


내 말을 들은 그녀는 대답했다. “마을까지 갈 필요 없어요. 근처에 순례자 화장실이 있어요. 유럽의 화장실 어디든 이용료를 지불해야 하지만, 순례자 우대 화장실(Pilgrim’s Toilet)은 돈도 안 받아요. 짱이죠?”      


진작 물어볼 걸 괜히 혼자 끙끙댔다.


“아~ 그래요? 어디예요 어디?”


금방이라도 달려갈 태세로 조안나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갔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가 닿은 곳은 다름 아닌....


우거진 풀숲.


하하하. 역시 다년간의 도보 순례 선배님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그래서 아까 조안나의 얼굴에 씨익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새어 나왔던 거구나.


하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뼛속까지 도시인인 나는 쭈뼛쭈뼛 기웃기웃 어색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체면을 차릴 상황이 못 됐다. 에잇! 모르겠다. 곧장 배낭을 내동댕이 치고 달려갔다.


그리고 비로소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영어표현 “Nature calls me.[자연이 날 부른다]”를

순례길에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적응이 빠른 사람이었던가?

어느덧 자연이 날 부를 때면 속으로 혼잣말을 되뇌었다.

마을아, 마을아. 빨리 멀어져라~  


 어느 손이 제 손이게요?


Lodeve에서 Joncel, Servier로 가는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 반복됐다. 오늘 길은 태양을 가려줄 나무도 없어 온몸으로 강한 햇볕을 받아내야 했다. 배낭과 맞닿은 등에 땀이 금세 차올랐다.


순례를 처음 시작했을 땐 내의에 긴팔 상의, 베스트, 그 위에 바람막이까지 입어야 했는데.

어느새 한낮엔 반팔에 팔토시 차림으로도 충분했다.

오늘따라 어쩜 바람 한 점이 없는지.

오르막길에 접어 드니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가쁘게 내뱉는 거친 호흡만 허공을 메웠다. 안 되겠다.      


"조안나 우리 좀 쉬었다 갈래요?"  "그러죠."


배낭을 길가에 내려놓고 팔토시와 장갑까지 다 벗고

온몸에 찬 땀을 식히고 있는데 조안나가 내 팔을 유심히 바라본다. 내 팔에 뭐라도 묻었나?


조안나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자신의 한쪽 팔을 앞으로 쭉 뻗어 보인다.

내 팔도 똑같이 들어 보란다.

영문도 모른 채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나란히 놓인 두 팔을 자세히 보고 나니, 그제야 깔깔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달라도 어쩜 이렇게 다를 수 있지?      


[팝업 퀴즈] 어느 손이 제 손이게요?

                     정답을 맞히신 분은 오늘 특별히

                     두 배의 행복을 빌어 드립니다.               

시계를 찬 부분을 제외하고 강한 햇빛에 팔과 손이 그을린 조안나의 손. (위)

어떻게든 피부가 타는 것을 막고자 팔 토시에 장갑까지 끼었지만 그 사이 작은 틈이 생겨 그 부분만 까맣게 그을린 나의 손.  (아래)


이것이 바로 태닝을 사랑하는 서양여인과

필사적으로 태양을 피하려는 동양여인의 극명한 차이.


조안나의 예리한 관찰 덕분에 더위에 지쳐 있던 우리는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입안 가득 베어 문 듯한 즐거움을 충전하고 오후 산행을 이어갔다.     


태양을 즐기는 조안나의 차림
팔토시에 장갑까지 태양을 피하고 싶은 포도알

하지만 다시 시작된 오르막과 오후의 뜨거운 태양은 다시 마음을 약하게 했다. 대체 마을은 언제 나오는 거야. 기다리니 더 더디기만 하다. 언제 익나 쳐다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더 끓지 않는 얄궂은 냄비처럼.   

   

이럴 땐 멀리 가 있는 시선을 거두고,

한 치 앞만 보고 걷는 게 상책.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에만 집중해 본다. 신기하게도 어지럽던 마음이 차츰 누그러진다.


불현듯 어쩌면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걷기를 통해 마음의 찌꺼기를 비워내기 위해 말이다.     


 바람 한 점이면 충분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드디어 기다리던 내리막이 시작됐다.

휴. 이제 좀 여유가 생겼다. 잠시 뒤 눈에 들어온 옹기종기 모여 있는 따뜻한 살구색 지붕들.


“야호! 드디어 마을이 보인다.”

마음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는데 그 순간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살포시 불어와 머리칼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준다. 와~~ 정말 감사했다.


그날의 한 줄기 바람을 난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갑자기 불어와준 바람 하나로 하루의 피로가 싹 가셨다. 그리고 절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울러 꽤 단순해지고 있는 나를.

바람 한 점에 행복해하는 나를.

아주 작은 것에 감사하고 있는 나를.


누군가 순례길에 숨겨 놓은 귀중한 보물 하나를

오늘 찾은 것만 같았다. 기쁘다.     


[그날 일기장에 적은 감사 목록]

-함께 걸을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감사

-더위를 식혀주는 바람이 있어 감사

-물집이 하나 더 생기지 않아 감사

-오늘도 낙오되지 않고 끝까지 걸을 수 있어서 감사          


 Day 7 : Saint Guilhem de Desert - Saint Jean de la Blaquiere 24.5km 완주 (18/04/2018)

 Day 8 : Saint Jean de la Blaquiere – Lodeve 18.5km 완주 (19/04/2018)

 Day 9 : Lodeve – Joncel 26.3km 완주 (20/04/2018)

 Day 10 : Joncel – Servies 26.5km 완주 (21/0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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