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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May 29. 2024

28편. 루르드(Lourde)에 운명을 맡기다.

[28화]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Day 29. Toulouse Lourde 기차 이동(2시간) (10/05/2018)


확신이 서질 않았다. 계속 도보순례를 이어가도 될지. 뚤루즈에서 나흘, 닷새 시간이 흐를수록 몸이 점차 회복됨을 느꼈다. 하지만 ‘무거운 배낭을 지고 다시 걸어도 될까?’ 란 질문에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기는 더더욱 싫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최종 목적지는커녕 스페인 땅도 밟아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발걸음을 돌릴 순 없지 않나.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걸 보니 좀 살아나긴 했나 보다.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머릿속만 복잡한 채,

프랑스 지도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는데 뚤루즈(Toulouse)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루르드(Lourde)가 보인다.


전 세계 사람들이 치유와 기적을 위해 모여드는 곳, 루르드. 언젠가 나도 한 번 가봤으면 하고 막연히 그렸던 도시. 그래! 일단 루르드로 가보는 거야!


그곳에서 나도 성모님의 도움으로 치유를 받으면 계속 걸어가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루르드 관광이나 실컷 하고 귀국하지 뭐.


난 그렇게 결정할 시간을 며칠 벌었다.

최종 결정권을 루르드에 내어주기로 마음먹고

루르드 행 기차표를 끊었다.     

다음 날 루르드 행 기차에 올라 번호를 확인하며 자리를 찾아갔다. 가방을 선반 위로 올리고 앉으려는데 서로 마주 보는 좌석이다. 그야말로 이건 복불복이다.

좌석이 마주 보고 있어 좋을 수도 불편할 수도 있을 터. '여차하면 그냥 눈 딱 감고 자면 그만이지 뭐'라고 생각하며 마주 앉은 분들을 살폈다.


젊은 백인 여학생 둘이 앉아 있다.

딱 봐도 20대 중후반 정도의 앳된 얼굴이다.

국적은 어디일까? 궁금하다.

말문을 터서 수다를 좀 떨까 말까

잠깐 고민을 하던 찰나 어색한 시선이 마주쳤다.

그래서 얼떨결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선 미소를 짓느라 살짝 입을 벌린 김에

에라 모르겠다 말문을 터버렸다.      


“안녕하세요? 어느 나라 분이세요?”

“저희는 독일에서 왔어요. 당신은요?”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아! 그래요? 저 2년 전에 한국 유니스트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했었는데..”

“어머나! 정말요? 한국에 와보셨구나. 제 고향도 울산인데.. 너무 반가워요~”    

기차 안에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것도 내 고향으로 유학을 다녀온 외국인 친구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더 반가웠고 우리의 수다는 물 흐르듯 자연스레 흘러갔다. 한국 음식 얘기, 전공 얘기까지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다 우리의 목적지, 루르드에 대한 얘기로 접어들었다. 궁금했다. 독일에서 프랑스의 루르드까지 가는 이유가. 할머니께서 루르드에 가서 기적의 성수를 받아 오라고 하셨단다. 말 그대로 할머니 심부름 가는 길. 하지만 자신은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단다. 어렸을 때 성당에 가면 십자가에 죽은 시체가 매달려 있는 것 같아 너무 무서웠단다.     


사실 그 친구의 고백은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반향이 컸다.

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내가 더 신기한지도 몰랐다.

어린아이의 눈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두 사람, 내 얘기가 궁금하단다. 백문이 불여일견. 얼른 난 도보순례자의 신분증, 크리덴셜 카드를 꺼내

두 사람에게 건넸다. 신기한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순례카드를 들여다보는 두 사람. 정말 아를에서 뚤루즈까지 걸어오셨다고요? 우와! 대단하세요.


“네.. 제가 생각해도 신기해요. 기회 되면 두 분도 도보순례 한 번 해보세요. 그런데 몸이 좀 아파서 루르드의 기운을 받아 보려고요.”

그렇게 한참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훌쩍 2시간이

다 가고 기차는 어느덧 루르드에 도착해 있었다.      

기차역을 빠져나와 루르드 성지에 다다랐을 때의 느낌을 난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하늘에 둥실 떠 있던 뭉게구름, 5월인데도 정상에 눈을 간직하고 있는 피레네 산맥의 풍광, 아름다운 성당의 전경. 화룡점정은 말로 형언하기 힘든 루르드의 기운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충분히 온몸으로 느껴지는 신비로운 기운.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했고, 발로 묵직한 땅의 기운이 전해져 오는 것 같기도, 그곳에서 기도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공기 중에 떠다니며 내 숨으로 들어오는 것 같기도 했다.

루르드가 품고  있는 얘기는 이랬다.

성모마리아가 1858년 2월 11일-7월 16일 마사비엘 동굴에서 14살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18회에 걸쳐 나타났다고 한다. 소녀는 마사비엘 동굴 근처에서 땔감을 채집하려 가브강을 건너려고 신발을 벗었을 때 폭풍우 같은 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강가 근처 나무와 수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빛이 나왔다. 발끝까지 하얀색 드레스에 하늘색 띠를 두르고 묵주를 들고 있는 여인을 보게 된다. 어느 날 그 여인은 소녀에게 흙탕물을 가리키며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라고 했고 소녀는 그대로 따랐다. 그랬더니 그곳에서 갑자기 엄청난 양의 샘물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후로 사람들에게 치유와 기적의 장소로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 유리안나의 소소한 이야기 -    
어반 스케치 by 김명숙

마침, 날 좋은 5월을 맞아 루르드를 찾은 많은 인파 속을 비집으며 사진도 찍고 루르드의 이모저모를 둘러보았다. ‘무염시태 대성당'과 '묵주기도의 성모 대성당', 지하의 '성 비오 10세 대성당’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고, 초에 소원을 담아 기도도 올려본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잊지 말아야 할 미션을 수행할 차례였다. 준비해 온 성수통에 치유의 성수를 가득 담는다. 배낭이 무거워지겠지만 나도 루르드에 온 이상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백혈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던 20대 중반의 꽃다운 제자와 유방암 투병 중이신 수녀님을 떠올리며 성수를 담았다.      

이제 우리 각자의 길을 가야 할 시간,

돌아서며 그 친구가 건넨 말은 날 놀라게 했다.


저 이제 돌아가면 성당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할머니는 성수가 필요하신 게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손녀가 갖고 있던 막연한 두려움이 치유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손녀를 보냈던 건 아닐지.


문득 내게 필요한 것도 육체적 치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루르드,

이곳에 나는 이미 기적처럼 와 있었다.


루르드의 성모님은 “계속 걸어 나갈 수 있을까?”란 막연한 두려움을 벗어던지라는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날 이곳으로 이끄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뚜벅뚜벅 걸어갈 용기를 내어 보라고. 

성수(聖水)'콸콸'프랑스에 이런 '치유' 도시가? (ms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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