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어냄의 미학
나는 이쁜 쓰레기를 만들지 말자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지난 글에서도 썼다. 멋지기만 한 영상은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가 없으면 아무리 화려해도 쓰레기라고. 커뮤니티에서 남의 작품을 보면서 혼잣말도 했다. "이쁘긴 한데...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데?"
하지만 가끔씩 난 보란 듯이 이쁜 쓰레기를 만들고 있었다. 스토리에 영상을 얹는 게 아니라, 멋진 영상을 뽐내기 위해 스토리를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었다. AI 영상 기술은 계속 좋아지고 있다. 프롬프트 몇 줄이면 그럴싸한 결과가 나온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조선시대 배경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저주에 걸린 남자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제작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서사를 강하게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만들수록 '습작이니까' 하는 마음에 적당히 내용을 덜어냈고, 어느 순간 맥락이 사라졌다. 그때부터 이미 꼬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유 없는 컷이 쌓였다. 버리기 아까운 롱테이크. 특히 요즘 AI는 액션씬이 잘 나온다. 그걸 보여주고 싶어 생각보다 길게 찍었고, 결과는 지루함이었다. 완성본을 처음부터 재생하는데, 중간쯤에서 멈칫했다. "이 컷, 왜 여기 있지?" 답이 없었다. 스토리와 상관없는, 그저 '멋져 보이는' 컷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하지 말라고 했던 걸 또 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어서 웃긴 건지, 나 자신이 한심해서 웃긴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반성하는 눈으로 커뮤니티를 다시 봤다.
이쁘기만 한 작품은 거기서도 넘쳤다. 동물이 나와서 총을 쏘고, 매트릭스의 한 장면처럼 총알이 슬로로 천천히 이동하고, 그걸 화려하게 피하고... 의미 없는 동작들의 연속. 잘 나가는 작품의 표면만 따라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눈에 박힌 작품이 하나 있었다. AI로 만든 사극이었는데, 할아버지가 판소리를 하고 그 소리를 따라 여러 지역을 돌며 목소리를 다듬는 이야기. 기술적으로 완벽하지 않았지만, 맥락이 있었다. 감정이 느껴졌다. 그게 차이였다.
이 경험 이후, 만드는 방식 자체가 바뀌었다.
과거에는 대략적인 스토리 흐름을 잡아놓고, 멋진 영상이 나오면 거기에 스토리를 끼워 맞췄다. 멋진 컷이 나오면 없던 씬도 만들어서 넣었다. 당연히 스토리가 무너졌다.
지금은 다르다. 3막 구조로 이야기를 먼저 설계한다. 결말을 먼저 정하고, 그 결말을 중심으로 맥락을 확장해 나간다. 멋진 컷이 나와도 스토리에 어색하면 덜어낸다. 초보일수록 화려한 트랜지션에 몰두하고, 고수일수록 담백함에 집중한다. 컷편집은 '덜어냄의 미학'이다. 최대한 덜어내고, 또 덜어내고, 다 덜어냈을 때 비로소 작품의 완성도가 올라간다.
주변에서는 AI 영상 제작을 '딸깍'이면 된다고 한다. 이건 해보지 않은 사람의 말이다. AI로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작품을 완성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이게 얼마나 손이 가는 일인지. 품을 들일수록 퀄리티는 올라간다.
나는 지금도 멋진 컷이 나오면 넣고 싶은 유혹이 온다. 기술이 좋아질수록 그 유혹은 더 강해진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멋진 컷 하나를 덜어내는 순간, 비로소 담백한 이야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