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 없는 공개적 일기 쓰기의 첫 시작
업무에 필요한 수첩을 찾다가 일기장을 정리했다.
아니, 일기장을 찢었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 두려운 마음에 찢고 또 찢었다. 쓰레기봉투의 가장 깊숙한 곳에 꾸욱 꾸욱 욱여넣어, 곧장 부지런하게 수거함에 내던졌다.
그렇다. 종이에 쓴 일기는 일기가 아니었다. 휘날린 글자로 빽빽하게 학대당한 종이뭉치는 나의 변기였다. 묵히고 묵혀 퀴퀴한 냄새가 나는, 더러운 감정을 배설한 변기였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우울들이 종이 위에 뒤엉켜 아우성쳤다. 눈과 귀가 따가웠다. 과거의 힘듦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대변을 치우듯 눈을 잔뜩 찌푸린 채 그들을 치웠다. 그들, 그들이다. 종이 속에 봉인된, 해결되지 못한 감정들이 생명을 지녀 다시 마주하기 힘든 에너지를 가지게 된 것 같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내가 처한 상황은 그렇게까지 공포스럽거나 고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역겨운 것이다. 분명 나열된 문장들을 읽으면 과거의 내가 안쓰러워야 하는데, 티끌의 동정심조차 들지 않으니 스스로가 더욱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렇다. 나는 나를 혐오한다. 그래서 과거의 '안쓰러웠던 나'를 안아주지 못한다. 똑바로 마주하지도 못한다. 나에게 위로받지 못한 '나'는 타인에게도 온전히 위로받지 못한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믿지 못하니, 모든 관계의 시작과 끝은 의심이었다. 매일 밤 꼬리를 무는 생각과 불신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이내 우울이란 감정에 깊숙이 잠겨버렸다.
그렇다. 나는 내가 쓴 일기를 싫어한다. 나의 칙칙하고 우울한 모습만 긁고 또 긁어서 악취나는 산을 쌓아 올린 그 일기장을 혐오한다. 그렇기에 공개적인 일기에는 늘 향긋하고 산뜻한 것들만 만들어서 올린다. 내가 행복한 이유, 감사한 것들, 보람찼던 하루, 희망찬 미래 따위를 분 단위로 올리며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터넷 세상 속 허구의 인물을 나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SNS 팔로워 1천 명이 넘을 때 즈음 소설보다 더 치밀하게 공개적 일기를 꾸며 쓰기 시작했다. 늘어나는 좋아요 개수에 부응이라도 하듯 보다 감동적이고 자극적인 글과 사진을 쓰기 위해 하루를 채웠고 서서히 나를 잃게 되었다. 술 없이는 잠들지 못했던 밤이 8개월을 넘기자, 지독하게 우울했던 어느 날 홀린 듯이 도로에 뛰어들었고 자살 암시 메신저를 마지막으로 모든 SNS를 탈퇴했다.
자살 실패와 함께 폐쇄 정신병동에 입원하게 되었고 직장 생활을 이어갈 자신이 없어 도망치듯 퇴사했다. 우울은 불행을 몰고 온다는 말이 있던가. 정신병동에서 퇴원한 다음날, 아버지 사업 문제로 집을 팔게 되어 급히 이사를 가야 했다. 월세로 들어간 아파트에서 한 달간 은둔 생활을 지속하며 몸과 마음은 바닥을 치게 되었다. 집안에서는 매일 밤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꿈을 꿨다. 깜깜한 방 한구석에 어린 시절 내가 있었다. 엄마 뱃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태아처럼 잔뜩 몸을 숨긴 채로,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었다. 홀린 듯 다가가 아이를 안아주었다. 아이에게서 태양처럼 눈부신 빛이 발광했고 이내 나를 집어삼켜버렸다. 몸이 부웅- 하고 뜨더니 사방이 새하얀 무중력 상태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기와 소녀, 그리고 숙녀의 모습을 한 이들의 형태가 일렁이고 있었다.
헉 소리를 뱉으며 꿈에서 깨어났다. 익숙지 않은 낯선 방과 문틈 너머로 스며드는 쌀쌀한 새벽공기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서랍 속 찢긴 일기장을 꺼냈다. 일기장에 종이가 몇 장 남지 않았다. 오돌토돌해진 종이의 흔적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불규칙하게 찢어져 있는 종이가 마지막까지 살기 위해 발버둥 친 생명의 흔적 같아서 불쌍했다.
'미안해...'
종이가... 종이가 나였구나. 나는 종이였구나. 나는 일기장이었구나...
이미 찢기고 버려진 과거의 나와 마주하게 되었다. 일기장에 남아있는 찢어진 종이의 흔적처럼 내 마음에도 아껴주지 못한, 사랑해주지 못한 과거의 내가 뾰족하게 남아있었다. 그들이 자꾸만 꿈에 나온다. 매일 그들에게 도망치는 꿈을 꾼다. 꿈에서조차 도망칠 수 있는 곳이 보이지 않는다. 외면할 수 없다. 아니, 이제는 외면하고 싶지 않다.
다시 일기를 써보려 한다. 꾸밈없는 진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공개적 일기를.
다시 살아보려 한다. 타인의 시선과 허세를 없앤 진정한 삶을.
백수가 된 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