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이사하면 우울감이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무엇이든 일단 해보겠다고 필라테스를 50회 수강신청하였고, 새책으로 책장을 가득 채웠다. 이유없이 가라앉는 기분과 무기력함에 샤워 한 번 하는 것이 버겁게 느껴졌지만 계획한 일을 모두 해내기 위해서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많은 사람들이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이면 우울감은 절로 없어질 거라고 했다. 하지만 운동을 하고 손수 밥을 차려먹어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음식의 맛이 잘 안 느껴져서 먹는 것에 대한 기쁨을 잊어버렸고 평소 좋아하던 드라마와 예능을 집중해서 보지 못하여 연신 TV채널을 돌리기 일쑤였다. 나중에는 잘 읽던 책 한 번을 펼쳐보지 못했고 매일 쓰던 일기마저 중단되었다. 매달 나가는 월세 때문에 하루빨리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데 아르바이트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그만두기 바빴다. 하루 두 번 하던 반려견과의 산책은 이틀에 한 번 꼴로 줄어들었다. 그렇게나 말하기를 좋아하던 내가 단어가 기억이 나지 않아 몇 번이고 말을 버벅거리다가 이내 입을 닫아버렸다. 나의 우울감이 극도에 달한 것 같았다. 퇴사 후 할 일들을 화려하게 계획해뒀다. 처음엔 그것들이 너무 벅차게 느껴져서 줄이고 또 줄여서 아주 작은 한 가지만 시작해보자고 다짐했다. 그게 바로 글쓰기였다. 하지만 중증 우울증 환자에게 글쓰기란 고통의 시간과도 같았다. 간단한 단어들이 기억나지 않았고 문장을 매끄럽게 쓰는 것이 어려웠다. 무엇보다 생각이 복잡해서 도대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정리되지 않았다.
앞이 아닌 뒤를 보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다고 한다. 최근의 내가 그렇다. 과거 열심히 살았던 나를 떠올리며 현재의 나와 자꾸만 비교를 했다. '예전에는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등의 생각에 갇혀 현재의 나를 온전히 돌볼 수가 없었다. 나아지고자 하는 의지는 분명히 있기에 아르바이트 면접을 당차게 보러 갔다가, 출근 하루 전부터 또다시 사회생활을 실패할 거라는 불안감에 밤을 새곤했다. 공포감은 금방 커져만 가서 결국 일을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주변에서는 당분간 푸욱 쉬라는 말 뿐이었다. 나도 정말 그러고 싶은데 '온전한 쉼'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짧다면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무런 생각과 걱정없이 온전히 쉼을 취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없었다. '쉬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가 아니라 '쉴 줄 모른다.'가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쉴까? 쉬면서 정말 걱정 근심을 내려놓을 줄 알까?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생각들을 스위치 끄듯이 OFF할 수 있는 걸까?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
가치있는,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사랑받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 받을 자격이 없으며 버려질 거라는 생각을 항상 해왔다. 살아남기 위해서 늘 발버둥쳤던 것 같다. 스스로가 잘난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 그런 인생을 살았다. 구질구질할 정도로 열심히 사는 인생을... 그렇다 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현재 백수상태의 내가 전혀 사랑스러워 보이거나 자랑스럽지 않았다. 숨기고 싶었다. 다들 나를 한심하게 생각할 것 같고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나아지려면 위와 같은 생각들을 없애는 연습부터 해야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사랑하고, 존재만으로도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기브 앤 테이크가 인생의 철칙이었던 내게 그렇게 생각을 바꾸는 건 꽤나 어렵고 힘든일이다. 더군다나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했을 때 행복함을 느끼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 어떨 때에 행복감을 느낄까? 맛있는 요리를 해서 사람들에게 나눠줄 때? 오래된 친구와 수다떨때? 연극무대에 오를 때?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갔을 때? 취향에 맞는 카페나 식당에 갔을 때? 자연이 아름다운 곳으로 여행을 갔을 때? 손으로 조물조물 무언가를 만들 때? 기분좋게 청소 빨래를 해냈을 때? 집에 돌아와 강아지가 나를 반겨줄 때? 강아지가 행복한 미소를 지을 때? 맛집에 가족과 친구를 데려갔는데 고맙다고 얘기해줄 때?
아, 나는 그럴 때 행복을 느끼는구나. 알고 있었네.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돈을 아끼고, 노는 시간을 줄이고 자기개발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로잡혀 멀리하던 것들이었지. 자기개발도 내가 살아있을 때, 즉 삶의 의지가 있을 때 가능한 거다. 지금은 내일 죽어도 그만 오늘 죽으면 땡큐인 시점에 더이상의 자기개발은 불필요하다. 이젠 내가 삶을 살아갈 의지가 생길 수 있도록 나를 돌보고 나를 행복하게, 안전하게, 평안하게 해주는 데에만 집중을 해야겠다.
그렇다면 오늘은... 뭐를 해야 할까. 20분을 고민해도 모르겠다. 다들 오늘 무엇을 하며 힐링을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