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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딸 정의 공주와 정현 옹주

정의 공주 -2

by 서진희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1477)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 해 보겠다. 큰딸 정소공주가 요절하자 더욱더 세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정의공주가 영특함과 재주까지 뛰어나다 보니, 세종의 자랑이기도 한 딸이었다.

정의공주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수학과 천문학을 잘했으며 아버지 세종과는 학문으로 소통을 자주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정의공주는 시집을 가고 나서도 오빠인 문종, 남동생인 수양대군, 안평대군과 함께 참여했다.


집현전 학자들과 고위 관리들 조차 한글 창제에 반대가 컷음에도 아버지에게 힘을 보태고자 변음(變音)과 토착음(吐着音) 연구를 하기 위해 백성들의 소리를 모았다.


조선의 지역마다 다른 사투리를 모두 모아 따로 분리하고 무엇이 어떻게 다른 지를 연구했다. 소리마다 가지는 특징과 뜻을 구분하는 일을 했다.


세종의 한글창제시 큰 고민이 어떤 모양을 통해서 문자를 만들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서 집현전 학사들과 여러 사람에게 질문을 할 때 마다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정의공주만은 기가 막힌 답을 제시하였다.


이렇게 한글 창제의 일등 공신인 정의공주가 그동안 가려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조선은 남녀 구별과 차별이 심했던 유교 사회였다. 긴 세월 동안 한글을 아녀자가 쓰는 ‘암클’이라고 폄하했던 시대였다.


당시 집권층과 사대부들의 한자 사대 사상과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반발을 최소화 시키기 위해 정의공주의 활약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訓民正音 而變音吐着 猶未畢究 使諸大君解之 皆未能 遂下于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百口”(세종이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음을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정의)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



정의공주는 죽산 안씨 함길도 관찰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 안맹담(安孟聃)과 결혼하였다. 시부 안망지의 고모가 고려 공민왕의 왕비 정비 안씨(定妃安氏, ?~1428)였다. 고려말 공민왕의 처조카로서 명문가를 이루었고, 조선 초기부터 세조대까지 중요 관직을 거친 집안이었다.


남편 안맹담(安孟聃)과는 부부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둘과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다.

안맹담은 술을 매우 좋아 하여 공주가 근심하자 세종이 사위를 직접 불러다가 혼을 내기도 하고 달래기도 고 한다.


안맹담은 세종 사후 계유정난에 가담하여 세조에게 1455년 좌익원공신(佐翼原功臣) 1등에 책록되어 노비와 전토 등을 하사받았다. 정의공주의 셋째 아들인 안상계는 계유정난에 가담하지 않고 동조하지도 않으며 저자도에 은거하였다가 후에 예종 대에 복관하였다.


안맹담이 1462년(세조8년) 죽자, 세조는 안맹담의 죽음을 슬퍼하여 조회를 폐하고 친히 제문을 지었다.



齠齕同遊痛貫衷曲

어릴 적부터 함께 교유하였기에 애통함이 마음에 간절히 사무친다.

<세조의 치제문 中>


불교에 조예가 깊었던 정의공주는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장보살본원경’ 상. 중. 하를 간행하고 이 책은 대한민국 보물 966호이다.

정의공주는 1477년 2월 11일 62세의 일기로 평탄하고 안락한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교경전 .


<地藏菩薩本願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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