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을 좋아하고 여러 방면의 재능과 백성을 사랑했던 성군(成君)의 딸들
조선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과 백성을 지극히 사랑했으며 신하(臣下)들과 이야기하기도 좋아했던 거의 만능에 가까웠던 왕이 세종대왕이었다. 이러한 분의 자녀들도 역시 각자 뛰어난 자질들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다.
세종은 부인이 6명에 자녀 수는 18남 4녀였다. 소헌왕후와는 부부 금슬이 돈독하였고 둘과의 슬하(膝下)에는 8남 2녀를 두었다.
소헌왕후 심 씨(1395~1446년)는 문하시중 심덕부의 아들 청천부원군 심온과 그 부인 순흥 안 씨의 장녀로 태어났다.
심 씨는 태종 8년(1408년) 당시 충녕 군이었던 세종과 혼례를 올렸다. 심 씨가 충녕 군의 배필이 된 까닭은 자신의 숙모이자 태종의 누나였던 경선공주의 주선 덕분이었다.
이후, 태종 18년(1418년) 음력 6월 남편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경빈에 오르게 되었다.
소헌왕후도 상왕인 태종 이방원에 의해 시어머니 원경왕후의 친정이 거의 멸문에 가깝게 된 것처럼 며느리의 친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 심온과 숙부 심정이 불경죄로 처형되었고, 그녀의 어머니와 친족들 마저 관비로 전락되는 수모와 참극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때 태종 이방원의 뜻을 받들어 숙청 작업을 앞장서 맡았던 사람이 심온(深穩)과 정적이었던 좌의정 박은(朴訔)이었기에 심온은 자손들에게 자신의 청송 심 씨 자손들은 절대로 “반남 박 씨 집안과는 혼인을 하지 말라”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친정이 큰 화(禍)를 당하는 와중에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소헌왕후에 대해서도 폐비 논의가 있었으나 왕자를 2명이나 출산하였고 내조의 공이 컸으며 당시에도 셋째 안평대군을 임신 중이어서 다행으로 폐비는 되지 않았다.
게다가, 왕과 대군이 강원도로 군사 훈련과 수렵을 겸해서 궁을 비운 사이 한양에 대화재가 났을 때 때에도 만삭의 몸으로 진두지휘하여 화재를 진압했다는 강단 있는 모습도 있었다.
태종 또한 질투가 심한 자신의 원경왕후와 다르게 소헌왕후는 세종의 후궁들과도 사이가 원만하고 신뢰하는 며느리라며 칭찬하였다.
소헌왕후 소생의 여러 자녀들을 후궁들에게 양육하도록 하면서 선왕의 후궁들에게도 극진하면서, 또한 막내인 영응 군은 신빈 김 씨가 6남 금성대군은 태종의 후궁 의빈 권 씨에게 양육하도록 했으며 내명부를 가장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종은 지나칠 정도로 자식들을 사랑했다. 요즘 말로 세종에게는 자식들이 금쪽이들 이였으며 부성애가 남달랐다. 특히 첫딸인 정소 공주가 몸이 약해서 겨울에는 안팎 출입을 단속하며 감기에 걸릴 까봐 과잉보호했다.
12살 어린 나이에 천연두를 앓다가 끝내 숨지자 어린 주검을 붙들고 놓지 않아서 장례가 늦어졌다고 한다. 영응대군(개명된 명칭) 세종대왕의 막내아들이다. 여리고 섬세한 성격의 막내아들을 애지중지하였다.
세종은 지나칠 정도로 자식들을 사랑했다. 요즘 말로 세종에게는 자식들이 금쪽이들 이였으며 부성애가 남달랐다.
특히 첫딸인 정소 공주가 몸이 약해서 겨울에는 안팎 출입을 단속하며 감기에 걸릴 까봐 과잉보호했다. 12살 어린 나이에 천연두를 앓다가 끝내 숨지자 어린 주검을 붙들고 놓지 않아서 장례가 늦어졌다고 한다.
영응대군(개명된 명칭) 세종대왕의 막내아들이다. 여리고 섬세한 성격의 막내아들을 애지중지하였다.
세종은 지나칠 정도로 자식들을 사랑했다. 요즘 말로 세종에게는 자식들이 금쪽이들 이였으며 부성애가 남달랐다. 특히 첫딸인 정소 공주가 몸이 약해서 겨울에는 안팎 출입을 단속하며 감기에 걸릴 까봐 과잉보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