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엿보기
---------정혜옹주 2편 ------------------
시집을 갔던 정혜옹주가 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1424년) 유일한 자식이 먼저 죽자, 불심이 깊었던 의빈 권씨는 불교 의식으로 화장을 하였다. 이후 의빈 권 씨는 딸의 사리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부도탑에 사후 15년 만에 안치했다. 정혜옹주의 시아버지 박신(朴信)은 고려 포은 정몽주의 제자였다.
조선 건국에 개국 공신으로 참여하여 이조판서와 찬성직을 역임했으며 조선 왕조 4대를 섬겼다. 선공감제조라는 직책에 있을 때 부패사건과 연루되어 13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박종우는 1423년(세종 5년) 명나라에 사은사신으로 연경에 다녀오고 세종의 신임을 받아 호조판서. 중추원지사등을 역임했다. 1451년(문종 1년) 운성 위로 개봉되었다.
그해 8월 의금부 제조를 겸직하였다. 1453년(단종 1년) 의금부 제조 운성위로 재직 중 한명회, 정인지와 수양대군 편에 가담하여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일파를 숙청한다. 이후 세조는 박종우의 장모인 의빈 권 씨가 어릴 때 애지중지 키웠던 금성대군까지 처형한다. 박종우는 정혜옹주 사후 재취(再娶)하였고 세조의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후에 세조로부터 1등 공신인 정난공신(定難功臣)으로 책록 되고 운성부원군으로 봉해졌다.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세조비 정희왕후의 남동생 윤사균, 성종의 정현왕후 남동생 윤사로 , 정인지. 박종우가 한양의 4대 부자(朝鮮四富)라고 세인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의 거부였다. 궁에서 살 때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 금성대군을 손수 품 안에서 키웠던 의빈 권 씨에 대한 남다른 정으로 세종과 금성대군이 정혜옹주가 1424년(세종 6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임금은 고기와 생선을 들지 않고, 조회와 경륜 저자를 사흘 동안 정지시켰고 부의로 쌀. 콩 1 백석과 종이 1 백 권을 내리고 관(官)에서 장례를 치러 주었다.
다음의 사제(賜祭)의 제문에 덕혜옹주에 대한 남매의 정과 사랑이 느껴진다.
“너의 성품이 곧고 아름다우며, 자질은 현숙하였다. 궁중에서 양육할 때부터 인자하고 효성스러운 이름이 나타났고, 결혼한 뒤에도 엄숙하고 화목한 것이 더욱 나타나 마침내 규문(閨門) 안에 화목을 가져오게 하여, 척리(戚里)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므로 남매간의 은정을 두텁게 하여, 작명(爵命)의 은총을 내린 것이다.” 세종은 정혜옹주에 성품을 칭찬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을 슬퍼하였다.
신라시대 때 창건 되었다는 경기 남양주 소재 수종사(水鍾寺)는 신라. 고려. 조선의 유물과 유적을 보유하고 있는 절이고 왕실의 비호를 받고 있던 절이었다. 왕실의 비빈들과 양반의 부녀자들이 자주 유숙하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수종사에 있는 주요 문화재가 1493년 금성대군이 세웠다는 정혜옹주 사리탑이다. 1939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청자유갱, 금동제 구층탑, 은제 도금 육각감, 수정 사리병 등이 발견되었다.
< 보물 제2013호 남양주 수종사 사리탑 >
이것은 각각 보물 제259호로 조선초 왕실 불교 신앙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