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여름 상설 공연>

여름 날의 순수함을 간직한 당신에게

by 조세연



습도가 높은 날은 냄새도 소리도 진해진다. 여름, 특히 장마철의 기억이 유난히 선명한 건 그 때문일까. 어린 시절의 여름은 왜인지 특별하다. 그때의 순수함을 평생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 남아 있는 건 지나버린 시간에 대한 상실감뿐이다. 눈앞의 생산을 멈추고 백일몽으로 도피하기도 하지만, 이 찰나의 순간이 정말 내 것인지 의문이 들 때면 그저 세월이 야속하다. 잡힐 듯 안 잡힐 듯한 그 맥락 없는 환상이 나를 조금이라도 어리게 붙잡아 준다면 좋으련만. 그 환상은 금방 사라질 걸 알면서도 여전히 아름다워 또 찾게 되는데, 시집 『여름 상설 공연』이 그러하다.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시집은 요괴와 같은 비현실적 존재들과 꿈, 회상, 그리고 환상을 끌어들여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허문다. 이 경계가 무너지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환상의 한가운데로 이끌린다. 시를 읽는 내내 젖은 흙 냄새와 수영장 냄새가 어렴풋이 떠오르고, 파도 소리와 매미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이 모든 감각은 어린 시절의 여름, 그러니까 내가 아직 순수함과 이상을 잃지 않았던 시절을 불러온다.


특히 몇몇 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짝꿍’이라는 존재는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자, 잊고 있던 나 자신을 찾는 여정을 암시한다. 이 시집 속의 사랑은 단순히 대상에게 향하는 감정이 아니라, 순수했던 나와의 재회다.


이런 감정은 시 <작은 물결>에서 드러난다. 시에서 화자는 수영장 물속에서 평온함과 안락함을 느낀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친구가 "죽은 줄 알았잖아"라고 말하는 장면은, 물속이라는 공간이 현실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일종의 꿈, 혹은 도피처였음을 알려준다. 이에 대해 화자는 “난 내가 살아 있는 줄 알았어”라고 대답한다. 이는 꿈과 같은 공간에서 오히려 삶의 실감을 느낀다는 의미이며, 우리가 현실에서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는 지점을 상징한다. 수면 아래의 고요함은 마치 세속적인 가치로 가득 찬 현실에서 벗어나 순수함이 보존된 장소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어릴 적 여름날처럼 잠시나마 살아 있음을 느낀다. 시집이 제공하는 환상은 일시적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우리를 현실에서 잠깐 이탈하게 하고 숨 쉴 틈을 준다.


하지만 박은지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다. 책을 펼치자마자 등장하는 문장은 “나 진짜 열심히 사랑할 거야. 더 많이 더 오래 성실하게. 엉망진창이어도 꼭 살아있자 우리”이다. 이 문장에서 '살아있자'는 다짐은 도피 속에서만 살아 있음을 느끼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 속에서, 비록 어른이 되며 사랑 같은 순진함이 타인에게 바보같아 보여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사랑하며 살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환상은 잠시 숨을 고르게 해주는 공간이지만, 결국 시인은 우리가 그 환상의 감각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로 현실에 발 딛고 서 있기를 바란다. 이 균형은 시 <정말 먼 곳>의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상을 벗어났다.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고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 (중략)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 구절은 명확하다.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있는 ‘정말 가까운 곳’이다. 상상과 현실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작동한다. 이상과 순수함이 환상 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 시 속에 깊이 배어 있다.


또, 시 <짝꿍의 모래>에서 시인의 이러한 태도는 더 선명해진다.


“부서진 미래가 전부 바다로 쓸려 가 버리면 우리는 어떡할까

그러면 내 미래를 나눠 줄게

짝꿍은 두 손 가득 모래를 들어 올렸다

함께 꿈꾸면 그 미래는 커질까 아니면 작아질까

알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미래를 다 쓰면 너의 미래를 가져다 살게

다시 성을 쌓아 올리고”


이 장면에서 ‘너’는 단순한 시 속 화자의 대상을 넘어, 이 시집을 읽는 ‘우리’ 모두로 확장된다. 박은지 시인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두려움 없는 상상을 상기시키며, “미래를 나눠 주겠다”는 말로 독자에게 손을 내민다. 시를 읽는 모두 각자의 상실과 불안을 지닌 채 이 세계를 살아가지만, 시인은 우리가 무너질 것 같을 때마다 지탱해주겠다는 약속과 위로를 남기고 있다. 나에게는 우리가 함께 성을 쌓아 올리는 아이들처럼, 여전히 희망을 지어 올릴 수 있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져 큰 여운이 남는 시였다.


가장 인상 깊은 시는 <( )에게>이다. “나 조금 길게 말해도 될까. 늘 필요한 말만 해야 해서 지칠 때도 있었어.” 이 한 구절은 나를 멈춰 서게 했다. 시인은 꽃과 눈, 하늘, 너무 당연해서 지나쳤던 것들을 말없이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시를 읽는 동안, 나 역시 주변의 많은 것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지금 속도와 효율,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들만이 더 우선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살아남기위해 더 세속적이고 생산적인 기계로 길들여져, 인간적인 느림과 여백을 외면하고 있다. 인간으로써 살아감이 아닌 오히려 인간성을 죽이는 것이 삶이 되어가는 것이 역설이다. 기술을 개발하고 새로운 것,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더 큰 자극을 좇는 것이 진짜 ‘살아있음’인가? 아니면 그냥 살아남는 것에 불과한가?


이 시집은 그 질문을 던지고, 동시에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우리가 놓친 것을 새롭게 보는 감각, 무너진 균형을 회복하려는 마음, 그리고 여전히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꿈과 순수함. 『여름 상설 공연』은 나에게 잠시 도피처가 되어주었고, 동시에 현실을 지탱하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 그 환상은 금방 사라질 걸 알면서도, 나는 이 책을 자꾸 다시 펼치게 된다.

그리고 간절히 바란다. 이 시집이 당신에게도 그러하길. 단지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책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더 깊고 단단하게 살아내게 해주는, 그런 버팀목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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