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걸어온 길

1. 정부의 고관여 정책에서 민간주도 경제로 전환되었고 양극화가 심화.

by 김병훈

5. 한국경제와 세계경제


(1) 한국경제가 걸어온 길.


① 한국경제 성장의 특징은 ‘압축적 불균등 성장’.

선진국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자본주의산업화 과정을 우리는 수십 년 만에 달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압축적 성장입니다. 기적이라 할 만합니다. 여러 가지로 유리한 국제적 환경을 잘 살리면서 우리 국민, 즉 노동자와 기업가의 능력이 충분히 발휘된 결과입니다.

한국만이 압축적 경제성장을 이룬 것은 아닙니다.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이른바 아시아 신흥공업경제(NIEs;Newly Industrializing Economies)도 2차대전 이후 고도성장을 경험했고, 오늘날 중국이나 동남아도 비슷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일본도 유럽 국가에 비하면 압축적 성장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압축성은 필연적으로 불균등성을 수반합니다. 당장 가시적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에 자원을 집중하다 보니, 각 경제 부문의 발전이 불균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나 사회문화 수준도 생산력의 발전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인권 보호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균등성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선 온갖 사회갈등이 표출돼 왔습니다.


압축적 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역동성이 불균등성에 부닥쳐 갈등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호주나 뉴질랜드로 이민 간 한국인들은 그 나라를 ‘심심한 천국’, 한국을 ‘재미있는 지옥’이라 말하곤 합니다.

이는 역동성의 재미와 갈등의 지옥을 동시에 지닌 한국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② 광복과 1950년대.

일제의 강점에서 벗어난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남한은 미국, 북한은 소련의 지배하에서 경제를 꾸려나갔습니다. 당시 남한은 긴급히 처리해야 할 두 가지 경제적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토지개혁 문제였습니다. 미군은 우선 일본인 소유의 토지를 유상분배하는 토지개혁을 착수했고, 이어서 이승만정부도 3정보 이상의 농지를 ‘유상매수-유상분배’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했습니다.

이러한 토지개혁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공업국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근대 자본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지주계급이 몰락하고 자영 농민층이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일본인이 한국에 남기고 간 재산인 귀속재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흔히 ‘적산’이라고 불렀던 귀속재산은 주로 가옥과 기업체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미군정은 귀속기업체를 일단 국가 소유로 돌렸고, 정부수립 후 민간 자본가들에게 불하하여 육성됐는데, 두산, SK, 한화 그룹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광복 후 특히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UN은 우리에게 막대한 원조를 제공했습니다. 한국을 소련의 세력권에 대항하는 반공군사기지로 키워나가기 위해서였습니다. 1950년대의 공업은 이런 원조물자를 가공하는 산업으로서 발전해 갔습니다. 밀을 원재료로 하는 제분공업, 면화를 원재료로 하는 방직공업, 원당을 원재료로 하는 제당공업으로 이들을 ‘三白産業’이라 불렀습니다.

흔히 수입대체 공업화라고 하며 정경유착이 싹트기 시작한 것도 이 시대의 특징입니다. 정부가 보유한 달러나 원조물자를 팔 때 시세보다 싸게 특정 민간에 파는 특혜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③ 1960~1970년대의 박정희 시대.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정부는 빈곤 탈출에 주력했습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해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했고, 생산설비 과잉에서 오는 문제점을 해결하고 외화도 벌어들일 목적으로 수출주도 공업화를 추진했습니다. 미국의 원조 감소에서 비롯된 타격을 줄이기 위해, 굴욕적이긴 하지만 한일협정을 체결해 차관 도입을 늘리고, 특정 기업에 집중적으로 자원을 배분하여, 그들을 재벌로 키워 나갔습니다.

국가주도, 수출주도, 외자주도, 재벌주도의 공업화가 자리 잡은 것입니다. 이런 정책의 성과는 연평균 8%가량 고도성장하면서 ‘한강의 기적’으로 나타났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경공업 중심의 수출에 한계를 느낀 정부는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습니다. 방위산업의 필요성, 유럽의 조선공업 쇠락 등에서 비롯된 국제분업의 새로운 양상이 한국 중화학공업의 가능성을 열어줬고, 중동건설 붐도 기여했습니다.


1972년 10월유신에 의한 박정희 총통제 수립의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성도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던 하나의 요인인 듯싶습니다. 이렇듯 급속하게 밀어붙인 중화학공업화는 많은 부작용을 초래했습니다. 집값 폭등, 인플레이션, 공장의 가동률 저조, 개발독재체제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폭발을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결국 대통령 암살로 이어졌습니다. 박정희 체제는 압축적 고도성장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민주주의를 짓밟고 국민 대중을 소외시킴으로써 결국 파멸하게 된 소위 ‘지속불가능한 개발’ 체제였던 셈입니다.


④ 1980년대 이후와 IMF사태.

새롭게 등장한 전두환 군사정권은 광주민주화운동 등 민중을 더욱 억압함으로써,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려 했습니다. 이들은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중화학공업의 과잉 중복투자를 강제로 조정하고, 물가 상승을 억제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나아가 ‘민간주도경제’와 ‘개방화’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은행의 민영화에 착수하고, 농산물 수입을 대폭 자유화했습니다.

군사정권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고, 마침내 1987년 6.10민주항쟁과 6.29민주화선언을 통해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습니다. 정치적 민주화와 더불어 노동자투쟁이 전개되면서, 그 결과 임금이 상승하고 근로조건이 대폭 개선되었습니다.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상승하면서 내수시장의 규모가 커졌습니다. 우리의 산업구조는 자본집약적이고 기술집약적인 방향으로 변화했습니다.


재벌기업들은 그동안 국가 경제의 발전 속도에 버금가는 급성장을 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정부가 더 이상 과거처럼 재벌을 관리 감독하기 아려워졌고, 은행들 역시 재벌들의 행태를 제대로 견제할 능력을 키우지 못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90년대 전반에 재벌들의 방만한 투자가 전개됐습니다. 또 1996년 OECD 가입을 계기로 자본자유화가 급진전되어 기업이나 금융기관은 외국에서 돈을 함부로 빌리고 있었습니다. 1997년부터 한보와 진로 등 재벌기업들이 줄초상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의 방만한 투자가 결국 자멸을 불러온 것입니다. 세계적인 외환위기로 외국금융기관들이 대출자금을 회수하자, 달러가 부족해진 우리 정부는 1997년 11월에 IMF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른바 IMF입니다.


IMF사태는 대내적으로 재벌과 금융의 낡은 시스템이 지속되고, 대외적으로 무분별한 개방이 전개된 것이 기본 요인이고, 여기에 정부가 환율정책 등에서 오류를 범한 것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IMF사태 이후 정부는 재벌, 금융, 노동 부문에서 개혁을 단행하고 개방을 대폭 확대했습니다. 30대 재벌의 절반이 쓰러지고, 600여 개의 금융기관이 사라졌습니다. 노동 부문에서도 정리해고제가 시행되고, 노사정위원회가 설치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무역과 외자도입이 거의 전면적으로 자유화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실업률이 높아지는 등 국민들은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후 경제는 회복됐지만, 과거와 같은 고성장은 어려워졌고, 중성장경제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경제의 양극화도 심화됐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IT산업과 비IT산업, 수출기업과 내수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커진 것입니다.

그리고 IMF사태 이후 경기부양 과정에서 가계부채가 급증하여 신용불량자가 양산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가계, 중소기업, 서비스산업의 구조개혁이 우리 경제의 주요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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