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로 말하는 삶의 동력
꾸준히 만남을 유지하는 관계가 있는 반면
한번에 만남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소위 “아는 사람”이 되는 경우도 빈번하게 있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는 키, 얼굴, 헤어스타일 등의 어느정도는 타고난 외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면
사회생활을 하고 나서는 이 사람의 패션을 통해 가치관, 애티튜드 등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른 나이의 임직원 6천여명이 되는 기업에서 팀장 자리를 맡게 되었고
경제적 안정감과, 결혼을 통한 심리적 안정감을 가지게 되니,
어느 순간 이 사람의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명함을 건네줄 때 살짝 보이는 손목
셔츠를 걷고 회의시간에 유려한 손동작과 함께 반짝이는 시계
굳이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위스키 잔을 들면서 보여주는 손목
멋있더라.
그렇게 난 시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래, 사치품
이 글은 시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사치품 전반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시계와 내 삶을 예시로 들은
삶의 동력의 관한 이야기이다.
단기적 삶의 목표를 설정하는 사람도,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인생의 한페이지에서 나는 나의 페르소나를 적극 활용하여 컨셉을 삶의 목표로 잡았다.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전, 내가 다짐한 목표 컨셉은
유복한 가정환경을 가진, 잘 놀지만 똑똑한 인기남이 되는 것이었다.
동네 옷가게에서 산 청바지, 유니클로에서 산 티셔츠, 정말 아무나 신고 다녔던 캔버스 운동화
거기에 디올옴므 2007 F/W 검은색 롱코트를 입었고 로고가 보이지 않는 지방시 니트를 입곤 했고,
학교 앞 술자리에서 다른 과와 합석 후 이성친구 교제,
대부분의 대학생이 그렇듯, 다소 가벼운 만남 등 몇번의 연애.
전공수업 발표 시엔, 몰래 한달간 준비 했지만
친구들은 전날 술을 마신 상태로 알고있는 상태에서 A를 받아내었다.
이런 몇번의 노력과 결과들로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목표한 컨셉을 달성할 수 있었고
이 후에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주위에서 스스로 나를 그런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단기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몇가지 사치품과 장치들로 꽤나 쉽게 달성 할 수 있었으며
졸업 후, 사회생활에서도 이어졌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신입 때의 목표 컨셉은
모든 것을 배우려 하고, 갑작스러운 돌발상황에도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직원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내 전공과 일면식도 없던 광고회사에 기획자(AE)로 취직하였고,
내가 설정한 목표한 컨셉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먼저, 모든 것을 배우려 한다는 것은
단순히 모든 걸 물어보는 것이 아니고 또한 누가 가르쳐 주길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면,
“00선배님, CPC 단가가 100원이고 CPM단가가 1,000원일 때 어떤 걸 기준으로 광고 집행을 해야 하나요?” 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00선배님, 현재 해당 광고는 CTR이 1%정도로 CPM기준으로 진행 시,
광고주 페이지로 진입하는 클릭 단가가 1원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CPC로 진행하는 것보다 저렴한 금액에 많은 고객을 유입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에는 단순히 숫자로 보는 효율을 선택하는 것 보다는
현재 브랜드가 타겟하는 고객이 모수가 적고, 유입되고 나서가 끝이 아니라
이 후 회원가입까지가 남아 있기 때문에 전체 비용이 크지 않는 선에서는
무분별한 중복 노출이 되는 CPM보다는 CPC로 진행하고 이 후에,
전체 금액이 커지고, 타겟 모수가 확장되면 CPM으로 진행 전환을 고려해보면 어떨까요?”
위 내용의 맞고 틀리고는 떠나서, 해당 의견을 제시했을 때, 00선배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모든 것을 배우려 한다는 것은 또한 단순히 업무에 국한되지 않았다.
당장 내일까지 작성해야 하는 보고서가 남아있음에도,
선배와 술자리를 가지며 사치스러운 문화,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으며, 친분관계 또한 쌓아 갔다.
예를 들면,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의 배경이야기는 양재 말죽거리 호프집에서,
<강남1970>과 윤수일의 아파트의 노랫말이 왜 아무도 없는 너의 아파트인지의
상관관계는 논현 영동시장 전집에서,
고 신해철의 부고 소식을 들은 날에는 회사 근처 노래방에서 <재즈카페>와 <민물장어의 꿈>을
어깨동무하면서 같이 노랠 부르고,
이와 같이, 회사생활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치스러운 지식과 경험의 나눔을 했다.
그리고 돌발스러운 상황에서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의 컨셉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이 때 나는 다시 한번 사치스러운 상상을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시간 뿐이 었기 때문에 무식하게 시간을 쓰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아직 발생하지도 않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무수히 많은 선택지, 갈림길, 발생 가능한 모든 순간을
머리 속으로 시뮬레이션하며 나의 대답, 반응, 등을 기획하고 되새겼다.
샤워를 하는 순간에도 혼자서 대화를 주고 받았으며,
술자리에서도 그런 순간을 가정하에 대화의 주제를 만들고 반응 했다.
그렇게 나는 중견급 광고대행사의 젊은 팀장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가까운 벤츠 전시장으로가서
가장 저렴한 엔트리급 벤츠 신차를 구매하였다.
개인적으로는 보상이었고, 크게는 젊은 팀장이 벤츠를 끌고 다니는
탄탄한 광고대행사의 이미지를 심어주어 영업을 좀 더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단기적 목표를 달성한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삶이 시들해졌다.
재미있는 일이 없는지 찾아 다녔으며, 더 이상 지식을 쌓지 않았고
업무는 기존에 쌓아온 지식과 임기응변으로 대응 했다.
그래서 이직을 했다.(사실 퇴사였지만 강제 이직을 당했다)
“기획”이라는 공통분모는 있었지만 깊게 들어간다면 완전히 다른 분야인 IT기획자로
나름 대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특정분야 국내 1위 기업에 입사하였다.
나는 다시금 팀장이 아닌 과장이 되었고, 여기서의 컨셉 또한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의 컨셉은
“명확하고, 빠른 상황 파악 및 분별력을 가지고 있으며,
온 힘을 다해 문제를 빠르고 정확하게 해결 할 수 있는 전문가” 였다.
사실 이 컨셉은 타의 반, 자의 반이었다.
회사가 나에게 이러한 능력을 요구하였으며,
나는 이러한 능력을 조금 더 있어 보이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즐비한 말년 과장, 차장, 부장을 제치고
1년만에 전사 최연소 팀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손목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번아웃, 누군가는 삶의 권태기, 누군가는 초심을 잃었다 라고 표현하는 것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젊은 놈이…벌써부터 라고 생각하였고
친분을 쌓은 선배들은 “네가 너무 젊은 나이에 단기적인 목표를 이뤄서 그래”라고 하였다.
그래, 단기적 목표 다음 목표가 없는 것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남자의 손목이 보이기 시작했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날카롭고, 항상 명확해야 하는 나보다,
여유로워보이는 그 남자가 되고 싶었고,
분명히 나보다 업무적으로 나은게 없는 것 같은데,
사람에게 유연하며 끌림을 가지고 있는 그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게 저 손목 위에 시계 때문인 것 처럼 보였다.
그 남자의 시계는 바쉐론 콘스탄틴의 피프티식스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