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 설명서

고장난게 아닙니다. 운영체계가 다를 뿐이에요

by 스텔라

나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 속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마치 오래 켜둔 전등처럼 서서히 어두워진다. 처음에는 그저 피곤한가 싶다가, 어느 순간 말수가 줄고 머리가 멍해진다. 누가 나를 힘들게 한 것도 아닌데 괜히 혼자 있고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예전의 나는 스스로를 나무랐다. 내가 왜 이렇게 예민하지, 왜 이렇게 사회성이 없지, 하면서.

지난주 며칠은 유난히 사람들 틈에 오래 머물러야 했다. 아이 학원 스케줄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엄마들 모임도 자연스럽게 겹쳤다. 딱히 불편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오히려 만나면 반갑게 인사도 나누고 밥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무난한 관계들이었다. 그런데 그 무난함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이어지자, 나는 서서히 말라가는 화분처럼 머리가 아프고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다툰 일도 없었고,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말수가 줄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오늘은 결국 아무 일정도 잡지 않고 마당에 혼자 앉았다.
차를 한 잔 내려놓고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쥔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날씨는 차가웠지만 공기는 맑았고, 새소리와 바람소리, 대나무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차가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칠 때마다 머릿속이 물로 씻긴 듯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내향형이 진짜 맞구나' 그제야 내 에너지가 어디서 생기고 어디서 닳아 없어지는지 또렷하게 보았다.

나는 사람들 속에서 기운을 얻는 사람이 아니라, 혼자 있을 때 기운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그 에너지를 조금씩 모아 두었다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쓰는 타입이었다.

그러니까 지난주에 내가 지쳤던 건 누군가가 싫어서도, 관계가 불편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사용’만 있고 ‘충전’이 없는 날들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마치 잔고를 확인하지 않은 채 카드만 긁어대다가 통장 바닥을 본 사람처럼, 나는 이미 방전 상태에 가까워져 있었던 셈이다.


나는 내향형이라서 소극적인 게 아니라, 내향형이라서 관리가 필요한 운영체제를 가진 사람이구나.

그제야 이해가 됐다. 외향형인 사람들은 사람을 만나며 에너지를 충전하고, 혼자 있을 때 그 에너지를 쓰는 구조라고들 한다. 나는 그 반대였다. 혼자 있을 때 충전하고, 사람을 만나며 에너지를 쓰는 구조. 그러니 나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사치도, 도망도 아니었다. 그건 유지비였고, 생존을 위한 필수 장치였다.

나는 그동안 이 사실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자주 무시해 왔다. 아이 스케줄에 맞추고, 관계를 끊기 싫어서 무리하고, “이 정도는 괜찮아” 하며 나 자신을 뒤로 미뤘다. 그러다 보면 어김없이 예민해지고, 말수가 줄고, 괜히 모든 게 버거워졌다. 그리고는 또 스스로를 탓했다. 내가 성격이 모나서 그렇다고, 사회성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하지만 오늘 마당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알았다. 이건 성격 결함이 아니라 설계도였다는 걸.

나는 얕게 흘려보내는 타입이 아니라, 깊게 느끼고 오래 저장하는 타입이다. 사람의 말 한마디, 분위기의 미묘한 결, 눈빛 하나까지 무심코 담아두는 대신, 그만큼 에너지를 더 많이 쓴다. 그러니 더 자주, 더 의도적으로 혼자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내향인이 방전될 때는 몇 가지 징후가 있다.
말수가 줄고, 사소한 말에도 쉽게 피곤해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이때 “괜찮아,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라고 스스로를 밀어붙이면, 그건 배터리 1% 남긴 채 계속 앱을 켜두는 일과 다르지 않다. 결국 어느 순간 꺼진다. 그리고 꺼지고 나서야 왜 이렇게 힘들었는지 뒤늦게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나를 이렇게 운영해 보기로 했다.



1.사람 많은 날 다음 날은 일부러 회복일로 남겨두기.
2.하루에 짧게라도 아무도 안 건드리는 시간 만들기.
3.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왜 이렇게 예민하지?”라는 말로 나 자신을 공격하지 않기.



거듭 말하지만, 나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 혼자 있어야 살아나는 사람이다. 이 사실 하나를 인정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나는 외향적인 사람들처럼 살려고 애썼고, 그게 성숙함이라고 착각했다. 늘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모임도 빠지지 않고, 밝게 웃으며 대화하는 사람이 되어야 어른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살수록 나는 점점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졌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아보려고 한다.

덜 만나고, 덜 말하고, 대신 더 깊이 쉬는 쪽으로.

사람들 속에서 버텨낸 나를 위로하는 시간도, 내 인생의 일정표 안에 정식으로 넣어두려고 한다.

나이 중반이 되어서야 나만의 운영체제를 알았다니.. 그래도 평생 모르고 죽는것보단 운이 좋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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