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집 안은 유난히 고요했다.
냉장고 모터 소리조차 멀게 들렸다.
아이들은 잠들었고, 거실에는 나 혼자였다.
나는 소파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채 앉아 있었다.
생각을 멈추겠다고 결심한 첫날이었다.
하지만 멈춘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머릿속이 조용해지자 오히려 더 또렷하게 들리는 것들이 있었다.
불안의 잔향.
후회의 파편.
미래의 흐릿한 그림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거실 끝 벽에 오래된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다.
이사 올 때 무심히 걸어두고 거의 쳐다보지 않았던 액자였다.
바닷가 풍경이었다.
잔잔한 파도, 푸른 하늘.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그림 속 하늘이 오늘은 유난히 깊어 보였다.
나는 눈을 비볐다.
그 순간이었다.
그림 속 수평선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바람 때문일까.
아니, 창문은 닫혀 있었다.
나는 숨을 죽였다.
그리고 정말로, 그림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천천히. 아주 자연스럽게.
긴 파마머리를 한 여인이었다.
흰 셔츠에 부드러운 색의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걸음에는 소리가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누구세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그녀는 빙그시 웃었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을 다시 만난 듯한 표정이었다.
“저요? 당신과 늘 함께 있던 사람이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현관문을 잠갔는지 떠올렸다.
아이들이 깨진 않았는지 귀를 기울였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이 궁금한 건 제가 누구인지가 아니에요.”
그녀는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거리감이 묘하게 편안했다.
“걱정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 그게 더 궁금하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걱정이 나쁜 줄만 알았죠. 없애야 할 것이라고.
그런데 걱정은 당신을 지키려고 생긴 거예요.”
“지킨다고요?”
“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실패에 덜 아프기 위해. 무가치해지지 않기 위해.”
그 말에 가슴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런데 지키는 방식이 과해진 거예요. 방패를 너무 오래 들고 있었죠.”
나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지만, 어깨가 묵직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그녀는 고개를 기울였다.
“없애려고 하지 마세요.”
“그럼요?”
“다루는 법을 배우세요.”
그녀의 눈은 이상하게도 맑았다.
비판도, 동정도 없었다.
그저 이해가 있었다.
“3개월.”
그녀가 말했다.
“3개월 동안 매일 한 시간씩 저를 만나요.”
“매일이요?”
“네.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묘하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건… 비밀이에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누군가에게 말하면 당신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 자신도 당신을 의심하기 시작하겠죠.”
나는 소파 팔걸이를 꽉 잡았다.
“3개월이면… 바뀌나요?”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이 걱정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그 문장은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만큼 단순했다.
나는 그동안 걱정이 곧 나라고 믿고 살았던 것 같다.
걱정 많은 나.
예민한 나.
생각이 많은 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밤 10시.”
그녀가 액자 쪽으로 걸어갔다.
“준비는 단 하나예요.”
“뭐죠?”
“릴렉스.”
그녀는 다시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파도는 다시 고요해졌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무섭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누군가를
이제야 다시 만난 느낌.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걱정을 붙잡지 않고 잠들었다.
그리고 벽시계가 열 번 울리는 내일 밤 10시를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