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수필] 합격자 발표

by 영애비

“1차 합격자 발표 났던데 확인해 봤어?”
“났어요? 아, 맞다. 오늘이 발표일이구나.
샘은 확인해 보셨어요?”
“어휴 임마. 합격자 발표일을 어떻게 잊어버리냐.
난 몰라. 가서 직접 확인해 봐.”


자신의 합격 발표일을 잊는 일이 정말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가능하다. 그것도 꽤 흔하게.

고3 2학기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교무실에서는 이런 장면을 자주 마주친다.
우리 세대와 달리 요즘은 수시로 원서를 여섯 장이나 쓸 수 있다.
여기에 수시 6장에 포함되지 않는 특수대학까지 더해지면
지원 일정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해진다.

그 결과,
정작 본인조차 자신의 합격 발표일을 헷갈리는 일이 생긴다.


그래서 3학년 담임교사의 달력은 늘 빼곡하다.
학생 이름 옆에 대학, 학과, 발표일이
본인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처럼 적혀 있다.
분명 한글인데, 해독은 쉽지 않다.

원서 접수가 끝나면
담임교사의 할 일은 원칙상 80~90%가 마무리된다.
이후 일정은 학생 몫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 일이라는 게
여기까지는 교사 영역, 여기서부터는 학생 영역
이렇게 무 자르듯 나뉘지 않는다.
“난 여기까지야”라고 투덜거리는 선생님은 봤어도,
아이들 입시 일정을 끝까지 신경 쓰지 않는 담임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그렇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고3 담임들에게는
아이들 입시를 챙기는 일이
마치 공기처럼,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자, 다들 환호성 준비하고… 열어 봅시다.”
“……”
“잠시만… 이거 뭔가 이상한데?
수험번호 잘못 입력한 거 아니야?”
“……”


몇 년 전, 고3 담임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호텔조리학과를 희망하던 H군이 있었다.
입학 때부터 요리사를 꿈꾸며
3년 동안 꾸준히 준비해 온 학생이었다.

생활기록부도 충실했고
내신 성적도 희망 학과의 커트라인을 훨씬 웃돌았다.
둘 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장학생도 가능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품고 있었다.

누군가 그랬다.
입시는 기세라고.


나는 H군에게
학급 TV에 노트북을 연결해
공개적으로 합격 여부를 확인하자고 제안했다.
학급 최초 합격자를 함께 확인하며
좋은 기운을 퍼뜨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예비 번호조차 없는 불합격이었다.

기세 좋게 제안했던 나도,
축하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던 H도,
환호성을 준비하던 아이들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침묵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 이후 나는
입시 결과를 예단해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해부터 TV에 등장하기 시작한 스타 셰프들의 영향으로
해당 학과 지원자가 급증했고,
커트라인도 급격히 높아졌다고 한다.


“죄송합니다만, 수험번호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겠어요?”
“네… 다시 찾아봐도 없네요.”


요즘은 수험번호만 있으면
휴대폰으로도 합격 여부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대학교 대운동장에 붙은 대자보 앞에서
자신의 번호를 찾아야 했다.

누군가가 눌러쓴 숫자 몇 개에 따라
천당과 지옥이 갈렸다.
대부분 울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구분하기도 쉽지 않았다.


우리 누나는
전화를 걸면 안내원이 직접 번호를 확인해 주는 방식으로
합격 여부를 알았다.
교대를 지원했던 누나는
첫 통화에서 “명단에 없다”는 말을 들었다.

충격을 받은 아버지가
다시 전화를 걸었고,
이번에는 합격자 명단에 번호가 있었다.
알고 보니 안내원이
‘교대’를 ‘고대’로 잘못 알아들은 해프닝이었다.


나의 경우는
ARS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는 시대였다.
수험번호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결과를 알려주는 방식이었다.
다만 지원 대학에 근무하던 집안 어른이
미리 합격 소식을 알려주는 바람에
정작 ARS를 눌렀을 때는
긴장감이 거의 없었다.


입시 방식은 시대마다 달라졌지만,
합격을 기다리는 순간의 무게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무게를
교실 한쪽에서,
혹은 집 안에서
함께 견디는 사람들이 있다.


고3의 겨울이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 땅의 모든 수험생들이여,
각자의 자리에서
끝까지 잘 버텨내기를.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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