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많이 좋아졌죠.
우리는 원서 들고 직접 대학에 접수하러 갔었잖아요.”
“저도 3학년 담임 처음 할 때
아이들이 인터넷으로 직접 원서 접수하는 게
제일 신기했어요.”
“그럼 아이들이 어디에 지망했는지
다 파악이 안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수시는 6군데까지 지원이 가능하잖아요.”
“상담하면서 같이 결정하고
접수까지 함께 하는 아이들도 많아서
대부분은 파악이 됩니다.
그래도 의견 차이가 크면
가끔은 모르는 경우도 있죠.
결국 접수 버튼은 학생이 누르니까요.”
학부모님들이 예전과 비교해
가장 놀라는 것 중 하나가
인터넷 대입 원서 접수 시스템이다.
내 기억 속 원서 접수는
종이 원서를 들고
해당 대학을 직접 찾아가는 일이었다.
우편 접수도 가능했지만
대부분은 직접 갔다.
기분 전환도 하고,
막판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물론 더 중요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첫 고3 담임을 맡았을 때,
아이들 원서 접수 기간은
생각보다 훨씬 긴장됐다.
나 역시 인터넷 원서 접수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클릭 한 번 잘못하면
원서 한 장이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선배 선생님들께
설명을 몇 번이나 들었지만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 접수 전에
내가 먼저 직접 지원을 해봤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고,
그보다 더 나은 건
직접 해보는 거니까.
걱정과 달리
인터넷 원서 접수는 금방 익숙해졌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혹시 잘못되면 어쩌지’라는
막연한 불안 때문이었다.
얼마 후,
원서 접수 마감이 임박한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갔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교무실이 온통 웃음바다였다.
“왜, 우리 학교가 맘에 안 들어?
아님 그냥 교직이 아닌 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이번에 원서 접수했더라?
보자… 아이고, 과도 좋네.
강원대 산림자원학과라.
누가 시골 출신 아니랄까 봐.”
“…….”
“분필가루 안 마시고
공기 좋은 데서 일하고 싶다, 그지?”
어떤 경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현직 교사가 대입 원서를 지원하고
결제를 하지 않자
학교로 확인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학과를 눌렀을 뿐인데,
그 일로 한동안
나는 ‘산림자원’으로 불렸다.
내가 원서 접수에 유독 민감한 이유는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는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고3 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1993년 겨울, 원서 접수 기간이었다.
오랜 상담 끝에 학과를 정하고
같은 학교를 지원하는 친구들과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다.
문제는 약속 장소였다.
휴대폰이 없던 그 시절,
지방에서는 기차역이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였다.
서울이 얼마나 큰지도 모르던 촌놈들은
아무 생각 없이
‘서울역’을 약속 장소로 선택했다.
결과는 뻔했다.
다들 미아가 됐고,
결국 각개전투로 헤쳐 모여 야했다.
조금 일찍 도착해
뉴스로 경쟁률을 확인하며
눈치작전을 펼치겠다는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졌다.
입시에서 눈치작전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합격만 놓고 보면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요즘도 눈치작전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마감 2~3시간 전이면
실시간 경쟁률이 비공개로 전환된다.
‘진짜’ 눈치작전이라 부르기엔
조금 애매해졌다.
그래도 매년
이 시간까지 학과를 못 정하고
담임교사에게
무거운 선택을 떠넘기는 아이들이 있다.
그야말로 찍기의 영역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 적중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원서가 마감되고
경쟁률이 다시 공개되는 순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탄식.
그것도 고3 입시의
익숙한 풍경이다.
그래도 요즘은 예전과 비교하면 애교 수준이다.
우리 세대의 눈치작전은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서너 장의 원서를 미리 써두고
물리적으로 가능한
마지막 순간에
경쟁률이 가장 낮은 학과가 소속된 단과대로 달려갔다.
물리적 시간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당시 원서 접수창구가
단일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과대별 접수처는 따로 있었고,
일정 시간이 되면
셔터를 내렸다.
셔터가 내려가기 전에
그 공간 안에 들어가야
원서를 낼 수 있었다.
서울 출신 친구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그야말로 가족 비즈니스였다.
온 가족이 동원됐고,
당시에는 보기 드물던
벽돌 휴대폰까지 등장했다.
셔터가 내려가는 순간,
좁은 틈 사이로
먼저 도착한 가족에게
원서를 밀어 넣었다는 무용담은
우리 과에서 오래도록 회자됐다.
종이 원서와 함께
우리 세대 대입 지원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존재가 있었다.
바로 담임교사의 인장이다.
지금 들으면 믿기 힘들겠지만,
그때는 담임교사의 인장이 없으면
그 원서는 그냥 종이 조각에 불과했다.
지금의 원서 접수가
100% 개인의 선택처럼 보인다면,
그때의 원서는
학교가 함께 책임지는 절차에 가까웠다.
“이 학생의 지원을
학교가 공식적으로 확인한다.”
대략 이런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횡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 장의 원서만 가능한 제도 속에서
상향 지원을 고집하는 학생들을
붙잡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기억 속 원서 접수의 마지막 장면은
떨리는 손으로
담임교사의 인장 위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이던 순간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클릭 한 번으로 원서를 접수한다.
인장도, 셔터도,
가족 총출동 작전도 필요 없다.
대신 화면 앞에서
몇 번이고 새로 고침을 누르며
마지막 숫자를 바라본다.
방식은 달라졌지만
긴장만큼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원서를 접수한다는 건
결국 한 시절을 통과하는
작은 의식 같은 것이라서,
세대가 바뀌어도
그 떨림만큼은
여전히 남아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