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생기부 몇 장이야? 나름 열심히 살았는데 좀 얇은가?”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냐? 내용이 중요하겠지. 생기부 무게로 뽑을 것도 아닌데.”
“그래도 어디 컨설팅 가니까 최소 20페이지는 돼야 한다던데?”
“에이, 그거야 예전 얘기고…. 지금은 많이 줄었잖아. 그래도 좀 쫄리긴 한다.”
다수의 학교에서는 수시 입시에 필요한 3학년 1학기 성적 처리가 끝나면
담임 주도로 학생들에게 각자의 학생생활기록부를 열람시켜 주기도 한다.
지금은 학생이나 학부모가
온라인 서비스를 통해 언제든 생활기록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학교 주도의 열람 방식에 대해선 논쟁의 여지도 있다.
다만, 현장에서 입시를 지도해 본 교사라면
“집에서 생기부 출력 안 해 왔다고? 그럼 오늘 면접 준비는 못 하겠네.”
같은 말이 얼마나 현실성 없는 이야기인지 잘 알고 있다.
학생생활기록부 열람 논쟁은
이 정도로만 해 두자.
고등학교 학생생활기록부, 줄여서 ‘생기부’라는 말이
일반인들에게 본격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한 건
2007년, 일부 대학이 입학사정관제 전형을 도입하면서부터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몇몇 대학의 실험적인 시도로 여겨졌을 뿐
지금처럼 큰 영향력을 가지진 않았다.
분위기가 달라진 건 2013년이었다.
정부가 ‘대입전형 간소화 및 대입제도 발전 방안’을 발표하며
학생부 종합전형을 본격 도입하면서부터다.
바야흐로 학생생활기록부의 전성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학생부 종합전형이 학교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수백 시간의 봉사활동으로 명문대에 합격했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약속이라도 한 듯 봉사활동이 유행처럼 번졌다.
그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고등학생 마더테레사’를 목격해야 했다.
외딴섬에서 자라 자연과 동식물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섬소년’의 명문대 입성기도 유명했고,
비슷한 사연을 가진 ‘예비 파브르’가
곳곳에서 등장한 것도 이 즈음이다.
학생생활기록부 간소화 지침이 나오기 전까지는
봉사와 수상 내역만으로
생활기록부 몇 장을 채우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시절
‘생기부 기본 20장’이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현재의 학생생활기록부는
그 자체로 학생의 역사서 역할을 한다.
입학사정관들은
내신이라는 정량 평가와
생활기록부에 담긴 정성 평가를 종합해
학생을 선발한다.
학생들이 생활기록부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가장 많은 민원이 발생하는 지점 중 한 곳이
바로 여기다.
아이들은 3년에 걸쳐 완성된 생활기록부를
읽고 또 읽는다.
형광펜과 포스트잇으로 가득한 그 모습은
마치 신림동 시절의 고시 서적을 떠올리게 한다.
입시철이 되면
핏기 없는 얼굴로
너덜너덜한 생활기록부를 들고 다니는 아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생활기록부를 그렇게까지 의식하며 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두 장 남짓한 기록이
인생을 좌우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실제로 입시에 미치는 영향도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생활기록부가 비교적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TV 프로그램 덕이 아닐까 싶다.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생활기록부를 화면에 띄워 놓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은
이제는 익숙하다.
교무실에서 생활기록부를 적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몇 줄 되지 않는 예전 기록이
수백 자로 꾸며진 요즘 기록보다
더 진실된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 시절에는 생활기록부에
지금처럼 많은 관심이 쏠리지도 않았고,
외부로 공개될 일도 거의 없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었으니
오히려 평가하는 쪽도, 기록되는 쪽도
조금은 솔직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몇 장 되지 않는 종이 서류에 적힌 몇 글자가
사람의 인생을 바꾼 일도 있다.
고향 친구 S가 그렇다.
워낙 사람이 좋아
‘바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해맑았던 S는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책가방 운전사’로 불렸다.
“오늘 조퇴해야 되겠다. 가서 소꼴 베서 여물 써야 한다.”
“선생님요, 내일 논에 모내기해야 하는데 학교 하루 빠지면 안 됩니까?”
참여를 중시하는 올림픽 정신으로 학교를 다닌 S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한참이 지나서야 철이 들었다.
늦은 나이에 전문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전기 기사로 성실하게 살고 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S가 이런 이야기를 해 줬다.
동네 공업사에 기술을 배우러 갔더니
사장님이 다른 건 몰라도
생활기록부를 한 번 보자고 했다는 것이다.
“이놈이 중간에 그만둘 놈인지 보려고 그런다카더라.”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자기 생활기록부에 대충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노력은 필요함.’
S는 그 한 줄을 읽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니들 우리 담임 기억 안 나나?
부처님 반 토막 같은 양반 말이다.
내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저리 적어 놨겠노?
그 길로 전문대 갔다 아이가.”
당시 S 담임선생님의 마음을
지금 와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정말로 S의 앞날이 걱정돼서
남긴 말이었을 수도 있고,
한 해 동안 쌓인 답답함이
무심코 문장에 묻어났을 수도 있다.
선의였을 수도 있고,
순간의 감정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한 줄이
S의 인생을 바꿨다는 사실이다.
요즘 아이들은
생활기록부의 분량을 걱정하고,
부모들은 한 줄 문장에 마음이 무겁다.
기록의 본질은
페이지 수가 아니라
그 아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일 텐데,
입시라는 현실 앞에서는
그마저도 흔들린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한 줄을 적을 때
조금 더 신중해진다.
그 한 줄이
누군가의 인생을
예상보다 오래 붙잡을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