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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당 Jun 15. 2022

토함산 산행

후덥지근한 6월이다. 지난주 조금 비를 뿌렸지만 아직도 긴 가뭄이 계속된다.

작년 이맘때 등산길이 가로막혀 오르지 못한 토함산을 올라가 보기로 했다.


울산 휴게소에서 아내와 육개장을 나눠먹고 남경주 IC로 내려오니 차창에 빗방울이 하나 둘 맺힌다.


옆에 앉은 아내는 산행으로 비를 맞으면 감기가 드니, 분황사나 황리단길 등을 가보자며 여우비처럼 오락가락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것이 풍부한가 보다!


비는 그치고 불국사 아래 주차를 했다.

온수병 짐을 줄이려고 차 안에서 커피를 마신 후 주차장 위 공원길을 올라갔다.


화려한 연등이 걸려있는 불국사 정문의 옆 길로 들어서니 금방 고요하고 호젓하다.


이 길은 내 마음속 최상의 길이다. 단풍나무가 터널처럼 우거져 가을에도 좋지만, 잡념의 여지가 없는 길이다.


약 1km의 넓고 완만한 길이 끝날 때쯤 약수터와 산행길로 갈라진다. 작년에는 산사태로 산행길을 막아 두었으나 오늘은 약수터길이 공사로 막혀있다.


산행길로 들어섰다. 길은 옆 산비탈의 흙과 돌이 흘러 내려온 흔적과 이를 막기 위한 철제 펜스로 길게 이어져 있다.


비 온 뒤라 바람이 가을처럼 스산하다. 나도 옷을 껴입고, 아내도 잠바를 벗고 입기를 반복한다.

산길은 고요하고 공기도 청량하다.


석굴암 종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땅이 촉촉하여 맨발의 아주머니도 뒤따라 올라온다. 돌계단을 올라갈 때 아내와 나는 스틱 하나씩을 사용하니 도움이 된다.


석굴암에 들어서니 현장견학을 온  중학생들이 떠들썩하다. 종각에는 범종 일타에 천 원 이상이라며 불우 이웃 돕기로 쓰인다고 적혀있다.

(예전에 아이들과 5천 원을 내고 삼 타를 친 생각이 난다.)


아내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이곳에 왔음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다.

정말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갔다.

나는 늙었고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엄마는 돌아가셨다.


석굴암 뒷길은 좁고 가파른 오솔길이다. 나무껍질의 멍석 길을 깔아 두어 발걸음을 딛는 질감이 부드럽다.


불국사와 석굴암, 두 개의 세계문화유산이 위치한 산길이어서인지 잘 정돈되어 있다.


이정표는 정상 500m 남았음을 가리킨다.


동해에서 피어난 바다 안개는 산 어깨까지 흘러와 나무 사이를 떠돌고 있다. 축축하고 음산한 냉기가 걷히질 않는다.


정상을 오가는 사람도 보이질 않는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모자도 없이 군복을 입은 두 명이 두툼한 가방을 들고 장난을 치며 걸어가고 있다.


우리는 걸음을 늦추며 뒤따라 간다. 30m 뒤에서 보니 옷이 흐트러져 있다. 둘 다 살이 쪄서 통통한 20대로 보인다. 검은 군화를 신었으나 전혀 국군으로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복장이다.


'아니, 이 산에 웬 군인이 올라갈까?

옷도 단정치 않고, 설마 바다로 침투한 간첩은 아니겠지!' 언뜻 생각이 스친다.


두 사람은 산행에 지쳐 있는지, 아내와 내가 아무리 늦게 걸어도 앞지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재빨리 옆으로 지나쳤다.


속도를 내어 100m쯤 더 올라가니, 또 군복 바지를 입은 두 사람이 서있다. 이 사람들은 상관인지 나이가 많아 보인다.


아마도 뒤에 오는 두 명을 기다리며 쉬고 있는 것 같은데, 옆에는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이 두세 개 보인다.


나는 깜짝 놀라 빨리 지나가려고 하는데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

"예, 반갑습니다." 나는 대답을 하면서 얼른 지나쳤다.


어디로 가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냥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군인들이 낫을 들고 조상 묘에 벌초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토함산을 오르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인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주변을 오가는 사람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낮이지만 어두운 숲 속의 안개만이 차갑게 스며들 뿐이다.

부정적인 상상만이 머리에 가득 떠오른다.


이 불안감을 아내에게 말할 수도 없고, 가만히 돌발사태의 대처법을 생각해 본다.


'만약 저들이 낫으로 공격을 한다면, 내가 대응할 방법은 1도 없다. 그렇다고 아내와 도망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는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정상을 앞두고 양 갈레 길이 나왔다. 한쪽 길의 벤치에서 조용히 에너지바를 먹으며 기다렸다. 이 사람들을 뒤따라 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들은 다른 쪽 길로 먼저 올라갔으며, 우리는 한참을 지나서 천천히 올라갔다.


위에서 군인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넷이서 정상석 옆 헬기 착륙장 주변 잡초를 열심히 제거하고 있었다.


'아하~ 그럼 그렇지! 세상사 모두 이유가 있는 것이리라!'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ㅎㅎㅎ"


우리는 가뿐하게 정상을 밟았다.

동해 쪽은 해무와 먹구름으로 가려져 있고, 앞쪽 남산 봉우리가 훤히 조망된다.


아내는 오늘 처음 토함산 정상을 올랐다.

정상석 앞과 뒤의 사진을 찍고서 우리는 하산했다. 하산길은 언제나 즐겁다.


불국사 돌담이 보이는 넓은 오솔길을 천천히 내려왔다. 올 가을에 다시 오기로 다짐한다.


차를 분황사로 돌려 황숙기의 넓은 보리밭을 구경하고, 도봉서당의 작약을 보고, 황리단길에서 갈비탕 순두부를 먹고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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