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빛 매듭

뽀대 나지 않은 거룩함

by 도이진

뽀대 나지 않는 거룩함


나는 나를 사랑하는 것만이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묻게 된다. 신은 왜 있으며, 종교는 왜 있고, 음악은 왜 있고, 추억이라는 단어는 또 왜 있는지. 어떤 날에는 나를 연민하다가, 어떤 날에는 같이 춤을 추다가, 울다가, 잎을 다 떨군 나목이 되는 날들이 왜 이렇게 고르게 삶 안에 갖춰져 있는지. 차오른 것만이 전부는 아닌데, 우리는 늘 차오른 순간만 정답인 것처럼 움직인다.


거룩함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해질 때, 나는 거룩함의 부재 쪽에 더 오래 머물렀다. 대학 때는 미션 스쿨에 있었고, 자유의지라는 단어가 큼지막하게 내 손에 남아 있었다. 믿으라는 말보다 선택하라는 말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대체 자유의지란 뭔데, 그렇게 비꼬아 바라보던 날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울하고 적적했던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밝아지던 시간은 채플 시간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한 분의 말씀이 날 칼로 찌른 날이 있었다. 주말 근무로 가장 holy 한 날을 지키지 못하는 중에 청년들 열 명 앞에서 비난처럼 꺼내 놓았을 때였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떠나 있었다. 그 이후로 기복적인 기도를 드리지 않게 되었다. 무언가를 달라고 말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신을 부르지 않게 되었고, 그 무렵 내 마음은 조용히 Ecclesia Catholica 쪽으로 굳어 버렸던 것 같다.


잘은 모른다. 왜 여전히 신을 저버리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다만 나와 맞지 않은 사람을 사귀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아니라는 음성을 분명히 들었고, 인생을 저만치 바닥 치던 순간에도 기도 속에서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불꽃같은 강인함도 있고, 한없이 추락해 나자빠지는 나약함도 있다. 시기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건 모두 나 아닌가.


부정적인 감정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 나는 어느 때보다 Deus를 간절히 붙들고만 있었다. Deus가 바라지 않는 쾌락을 향해 갈 때마다 환경은 마구 뒤집히듯 흔들렸고, 그 흔들림 끝에서 나는 기어코 바른 방향으로 되돌려지고 있었다. 그래서 감히 고찰하게 된다. Iesus의 광야 역시 마귀의 역사 이전에, 힘든 인생 한가운데서 Deus와 멀어졌다고 느꼈을지도 모를 시간은 아니었을지.


작년은 Deus가 나에게 외로움이 무엇인지 묻던 시간이기도 했다. 외로움이 뭐야, 그게 대체 뭔데, 하고 말하듯 사람들을 하나씩 떼어 놓고 최소한의 인간관계만을 바라보게 하셨다. 너를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는데도 그래도 소협 한 인간관계로만 살겠느냐고 묻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사람을 소협 한 사고로만 대하지 말라고, 속으로 취사선택하지 말라고, 애초에 타인은 다르기 때문에 힘든 거라고. 보이는 것에만 열중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에도 매달려 보라고.


기복적인 기도를 전혀 드리지 않게 되었을 때, 오히려 평강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도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그렇게 지나쳐 왔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어느 날 믿음이 없으신 아버지가 왜 성당에 나가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율법적인 변명만 되뇌어 본다.


작년 연말 마지막 날이 오백오십오 일째였다고 했다. 왜 새겼느냐는 질문을 몇 번쯤은 받았고, 그때마다 나는 말을 고르는 쪽을 택했다. 설명하면 가벼워질 것 같았고, 대답하면 오히려 멀어질 것 같았다.


고르고 고르는 동안, 죄책감의 무게가 남아 있었다.

말에 무엇 하나 더하지 않기로, 말에 말을 더하지 않기로만 해 본다.


죽으면 사라질 것이다. 그건 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중요해서, 그래서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고.


* 소협 한: 필자의 조어로, 좁아진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 도이진